"고기 먹고 튀어"…독거 노인 3인방의 유쾌한 일탈

2025-10-29

한국 영화가 위기라고 하지만 위기 속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 탄생했다. 영화는 독거 노인들의 일탈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삶과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연결키시는 진지함에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관객에게 넌지시 각자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미덕이 있다. 영화 ‘사람과 고기’ 얘기다.

독립영화 흥행 기준인 관객 1만 명을 넘어서며 개봉 3주 차에 2만 명을 돌파했다. 관객들은 상영관을 늘려달라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응원 메시지를 띄우고 장항준 감독, 가수 윤상, 배우 최강희·유태오 등은 후원 상영회에 동참했다. 이 영화의 힘은 무엇일까.

영화의 주연은 핫한 배우들이 아니다. 연기 경력 도합 160년의 원로 배우들을 주연으로 내세웠다. 폐지를 줍고 노점에서 채소를 파는 노인들이 식당을 돌며 고기를 먹고 도망가는 무전취식의 설정도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불편해서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다. 그럼에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지를 줍고 마트에 들른 우식(장용 분)이 고기 한 팩을 들었다가 내려 놓고 500ml 우유 한 팩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비야, 할애비 왔다”며 시작하는 영화는 관객을 매료시킨다. 독거노인의 일상을 이처럼 잔잔하고 압축적으로 한 컷에 보여줄 수 있는 연출력과 원로 배우의 연륜이 느껴지는 담백한 연기 덕이다.

이후 영화는 채소를 파는 노점의 노인 화진(예수정 분) 앞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 형준(박근형 분)과 우식이 폐지 한 장을 놓고 따귀를 때리는 장면을 보여주며 노인들의 고된 일상과 삶을 비춘다. 먼저 맡아 놓은 폐지를 가져간다는 이유로 싸우는 이들은 “폐지 한 장 때문이 아니야. 이건 자존심 문제지”라며 항변한다. 그러나 둘의 관계에 반전이 생긴다. 별다른 화해의 말 없이 둘은 가까워지고 형준이 우식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번듯한 양옥에 살고 있는 형준에게 놀란 우식은 발길을 돌리려 하지만 형준의 간청으로 집에 들어선다. 구멍 난 양말을 발가락으로 숨기면서 믹스 커피를 대접하는 형준에게 우식은 계면쩍은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커피 말고, 밥은 없나”

이때부터 형준과 우식의 ‘고기 먹고 튀어’의 서막이 열린다. 따끈한 소고기 무국을 먹고 싶다는 우식의 말에 형준은 채소 노점 할머니 화진에게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하면서 화진도 ‘먹튀’에 합류한다. ‘너무 비싼 소고기는 안되고, 장사가 잘 되는 집이어야 한다’ 등 나름의 전략을 짠 3인방은 처음에는 어색해 하다가 우식의 진두지휘 아래 잘 먹고 잘 도망간다. 식당 사장들은 노인들을 의심하지 않고 담배 피우는 척, 화장실에 가는 척 이들의 ‘먹튀'는 계속된다. 잡힐 뻔하기도 하지만 함께 하는 ‘먹튀’는 즐겁기만 하다. 식당을 몰래 나와 숨이 차게 뛰다가 포기할 것 같지만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뛰니까 살아 있는 것 같애.”

이들의 일탈은 어쩌면 고기 자체가 먹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하기 위한, 그리고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한 의식일 수 있다. 홀로 먹고 도망가는 게 쉬울 수 있는 데도 동지를 만든다는 것은 어린 시절 수박 서리, 참외 서리를 하던 추억을 복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특히 오랫동안 ‘혼밥’을 하거나 고양이와 우유를 나눠 먹으며 허기가 아닌 외로움을 달랬을 우식이 바랐던 것일 수 있다. 무전취식을 하면서도 신나 하는 이들 사이에 웃음과 농담이 떠나지 않았던 이유다.

영화는 주로 우식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마지막에 글도 못 쓰면서 편지 쓰는 것을 좋아했던 그의 정체와 사연이 드러나는 편지 한 장이 나온다.

“죽기도 구찮고, 살기도 구찮다. 창공을 잊은 채 주저 앉아 그저 펄럭이는 날갯짓 가슴 속에 할 말이 많아 배고픔도 잊어 버린다. 호떡 하나 주세요. 그 한마디 건네기가 계면쩍어 여적 춥다. 시린 가슴 덥히게 불을 질러 볼까.”

이 글의 제목이 무엇일지 형준이 묻자 화진은 “독거 노인?”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그런데 제목은 ‘청춘’이다. 이 영화의 ‘한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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