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日총리도 깜짝…韓외교관 쓴 영어동화, 한글본 나왔다

2024-11-20

꼭 20년 전, 당시 64세였던 라종일(84) 신임 주일 한국대사가 도쿄에 갓 부임했을 때다. 당시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ㆍ82)를 부임 인사차 방문했을 때 화제에 올랐던 건 다름 아닌 동화책. 라 대사가 1983년 한국의 설화와 민담을 토대로 영어로 펴냈던 동화책 이야기였다. 고이즈미는 "대사께서는 동화작가라고 들었는데, 정치학자가 어떻게 동화를 쓰시냐"고 물었다. 서울대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뒤 외교관이 된 그가, 동화를 쓴 배경에 대한 호기심이다.

고이즈미도 궁금해했던 그의 동화가 최근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다. 『밤드리 노니다가』(헤르츠나인)라는 제목으로 그가 영어로 썼던 다섯 편의 동화를 담았다.

라 전 대사가 2004년 고이즈미 총리에게 내놓은 답의 요지는 이러했다. "동화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일을 다른 차원에서 새롭게 보여줄 수 있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외교·안보 요직을 두루 거치고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인 그는 지난 15일 중앙일보에 "동화는 어린아이의 순수함, 어른과는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라며 동화 예찬론을 펼쳤다. 그의 또다른 동화, 『비빔밥 이야기』는 중국을 포함해 16개국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그는 "여러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좋다"며 "외교관이 안 됐다면 직업적 이야기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영어로 썼던 까닭은 뭘까. 외교 현장을 누비기 전부터도 그는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쓰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었다고 한다. 영어신문에 정기 기고도 하던 중, 문득 "우리나라의 설화를 토대로 영어 동화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 해외에서 관심을 보여 출간도 했다. 그 자신은 현업에 바빠 잊고 있었던 걸 연세대 국문과 김철 명예교수가 번역 출간을 권했다고 한다. 번역도 김 교수가 직접 했다.

이야기의 원천은 우리네 설화와 민담들이다. 그는 "우리나라엔 설화가 풍부한데,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더 풍성히 해주고, 오늘날의 K팝이며 영화에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파우스트' 역시 각각 덴마크와 독일의 설화에서 비롯됐다고도 덧붙였다.

이번 책에 담은 '용과 미녀'와 '오쟁이 진 남자'는 모두 1281년 출간된 『삼국유사』에 실린 헌화가(獻花歌)와 처용가(處容歌)에서 각각 영감을 받았다. 헌화가는 신라시대 수로부인이 탐을 내던 절벽의 꽃을 위험을 무릅쓰고 따다 바친 노인의 이야기다. 라 전 대사는 이를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풀어낸다. 용은 자연의 초월적 권위를 상징하며 인간의 복종을 받는데, 어느날 미녀가 출현해 인간이 마음을 빼앗기자 용이 납치를 한다는 게 줄거리다. 그는 "이걸 썼던 80년대엔 군사정권에서 용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라고 사람들이 해석할 수 있다면서 출간을 금지하기도 했다"고도 털어놨다.

라 전 대사는 용이라는 존재에 대한 한국과 서구의 차이에도 주목했다. 그는 "서양의 신화에선 용을 죽이고 호국영웅이 되는 무사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용을 숭상했다"며 "자연을 정복이 아닌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처용가에 대해 그는 "간단히 말하면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보고 측은히 여긴다는 줄거리인데, 자신을 배반한 사람까지도 용사하는 경지와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풀이했다. 이어 "셰익스피어가 쓴 '오셀로'에선 불륜을 의심한 주인공이 아내를 죽이는 것과도 대비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삼국유사』를 읽는 아이들도 요즘엔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네 문화의 힘은 설화와 민담에 있다는 사실을 되새겼으면 한다"며 "한국어를 지키고, 문화를 더 풍부히 하기 위해서라도 설화를 더 읽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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