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중국인

2025-11-10

고권일, 농업인·수필가

노안에 이어, 청력과 치아도 예전과 같지 않다.

인생의 내리막. 덜 보고 덜 듣고 덜 먹으라는 가르침 같아, 그러려니 무상한 세월 건너간다.

그런데 시도 때도 없는 건망증에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찾는 물건 어디에 뒀는지 몰라 허둥대며, 엄한 데 들쑤셔대는 바람에 노인 체면이 갈수록 말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지갑을 잃어 버려,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일본 여행을 다녀 왔다. 비행기 탑승 전, 여자 친구들이 난데없이 ‘젊은 오빠’라고 치켜세우며, 음료수를 한 턱 쏘라고 졸랐다. 못 이기는 척 가까운 커피숍에서 음료 가득 들고 나와, ‘거들먹거리며’ 나눠 마셨다.

그때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비행기를 탑승해서 주머니를 살펴보니,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가방까지 탈탈 뒤집어 가며 살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승무원에게 잠깐 나갔다 오게 해달라고 애걸복걸 통사정을 했지만, 규정상 탑승이 완료되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싸늘한 대답만 돌아왔다.

천만다행으로 여권은 가방 안에 따로 보관하고 있었지만, 환전한 엔화와 한화 약간, 주민등록증과 신용카드들이 담긴 지갑은, 나를 버리고 떠나 버렸다.

일본에 도착한 이후 인천공항 분실물 센터에 전화를 해봤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고, 인터넷 접속에도 실패했다. 대신 여행 기간 중 내 주머니 사정을 아는 친구들에게 빌붙어 기둥서방처럼 얻어먹고 마시며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귀국길에 오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큰 기대 없이 인터넷으로 분실물 센터를 확인해 봤다. 그런데 웬걸. 지갑을 보관하고 있다는 답신이 왔다. 게다가 6개월 동안 보관되며, 원하면 택배를 통해 집으로까지 보내줄 수도 있는데, 현금이 들어있는지라 방문해서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제주행 비행기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에 늦지 않게 방문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10여 일 후. 서울 가는 길에 인천공항 지하 1층 분실물 센터를 방문했다. 이산가족처럼 헤어졌던 손때 묻은 지갑이, 오롯이 내 품으로 들어 왔다. 감사 인사라도 드리려, 신고한 분의 인적사항을 물으니, 중년의 중국인이 직접 유실물 센터로 찾아와 신고했다는 것이었다.

‘유커’(遊客)들의 추태소식 접하며, 중국인들을 혐오로 백안시(白眼視)해 왔던 것이 부끄러워서 죽는 줄 알았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인데, 센터까지 직접 들고 와 습득 신고를 했다니….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

맡기고 간 이의 전화번호를 수 차례 눌러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직원은 아마도 이미 출국한 후라 통화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인연을 맺은 ‘선량적 중국인’(善良的中國人)에게 존경과 감사를 전한다.

“씨에씨에(謝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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