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드페이퍼(End paper). 파마를 할 때 모발 끝에 붙이는 종이를 뜻한다. 윌리엄 도어시 스완(1858~1925). 미국 최초의 퀴어 운동가이자 드래그퀸(예술이나 오락·유희를 위해 여장을 하는 남성 동성애자)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신의 흑인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64)는 자신이 살아 온 궤적과 관련된 이런 독특한 소재들로 ‘사회적 추상화’로 불리는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그는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의 대표 작가였으며, 2021년에서는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도 뽑혔다.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개막한 브래드포드의 국내 첫 개인전 ‘Keep Walking’은 지난해부터 독일 함부르크반호프 미술관이 연 순회전의 일환으로,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예술 세계가 녹아있는 작품 40여점을 만날 기회다.

‘엔드페이퍼’ 연작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의 어머니는 미용실을 운영했다. 엔드페이퍼는 1000장이 담긴 한 상자가 4달러밖에 되지 않는 저렴한 재료이자, 미용실을 중심으로 소통·교류했던 흑인 공동체의 상징이기도 하다. 미용실은 여성이나 게이 남성이 일하는 장소라는 편견도 있었다.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일을 돕기도 했던 브래드포드 또한 게이 남성이다. 키가 2m에 이르지만 체구는 마른 그는 흑인 문화 중에서도 남성성이 느껴지는 스트릿댄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남성들이 여장하고 모델처럼 걷거나 춤추는 ‘볼룸’(Ballroom) 문화에 가까웠다.
그가 스완의 몸짓을 바탕으로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2025)를 만든 것은 젊은 날에 겪었던 경험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폭풍은 2005년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뜻한다. 재즈의 발상지로 유명한 뉴올리언스는 그의 아버지의 출신지였으며, 대형 폭풍이 닥쳤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며 소외된 흑인이 많은 곳이었다. 검은 벽지로 둘러싼 전시장 안에는 스완의 몸짓을 그린 그림 위에 래퍼 케빈 제이지 프로디지의 노래 ‘HERE COMES THE hURRICANE LEGENDARY KATRINA’ 가사가 스텐실로 새겨진 대형 화폭 7점이 놓였다. 프로디지 역시 볼룸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자연재해 앞에서 피해를 본 흑인들과, 재해와도 같은 사회적인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스완이 화폭에 겹쳐졌다.

브래드포드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배경을 알아야 하는 작품 외에도 여러 대형 작품들이 존재감을 내고 있다. 전시 공간 바닥 약 600㎡를 다양한 색의 캔버스와 종이, 끈으로 채운 ‘떠오르다’(2019)는 벽이 아닌 바닥에 회화를 옮기고, 관람객이 직접 밟으며 지나갈 수 있도록 한 독특한 구상이 눈에 띈다. 관람객이 발로 밟고 흩트리며 생기는 변화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공기가 다 닳아있었다’(2025)를 포함한 기차 시간표 연작 3점은 각자 폭 5m, 높이 3m가 넘는 대형 작품으로 미국 각지와 소요 시간이 적힌 기차 시간표를 통해 20세기 차별을 피해 이주했던 흑인들의 삶을 표현한다.
서로 다른 크기의 지구가 공중에 매달린 설치 작품인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2019)는 ‘지구촌’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불공평한 환경에서 어떤 지역은 고립되거나 생태 위기의 직격타를 맞는 현실을 나타낸 작품이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대사에서 따온 작품명은 권력욕이 초래한 세계의 파괴를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브래드포드는 31세가 돼서야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미국의 추상미술은 백인이 주도했으며, 여성이나 유색인종의 이야기는 자주 다뤄지지 않았다. 흑인의 하위문화를 오래도록 경험한 그가 ‘사회적 추상화’를 추구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른다.
브래드포드는 지난달 31일 기자간담회에서 “늦은 나이에 예술학교에 입학하기 전 너무 많은 경험을 했다”며 “사회의 역사나 경험을 (작품과) 분리시키거나 삭제하는 대신 제 작업 안에 유지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볼룸 문화를 다룬 신작 ‘폭풍이 몰려온다’를 발표한 데 대해 “뭔가 어떤 식으로 읽혀질지 정답이 정해진 곳에서 작품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며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도 서로 멀어지고, 국가들도 문을 걸어 잠그는 이 순간에 작품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식으로 스스로를 노출시켜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25일까지. 입장료는 성인 1만6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