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정된 것은 없다.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하다.” 백은선 시인은 시집 『도움받는 기분』(2021)을 여는 시인의 말에 이렇게 두 문장을 적어 넣었다.
그는 늘 현재의 시점에서 글을 썼다. 2012년 등단한 이래 시집 『가능세계』(2016),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2019), 『도움받는 기분』(2021),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2023)을 냈고, 각각의 책에서 시인의 시선은 미묘하게 다르다.
백은선은 솔직한 형태로 길어올린 마음을 언어로 빚어낸다. 그의 시가 삶의 기록으로도 읽히는 이유다. 이 특징은 산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첫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2021) 에서 “나는 내가 싫다. 나는 내 삶이 싫으면서 좋다.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면서 안도한다”고 말하는 백은선은 거침없는 문장으로 독자의 공감을 끌어냈다.

그런 그가 신간 『뾰』(2025)로 4년 만에 산문을 내놓았다. 출간 하루 전인 지난달 31일, 중앙일보에서 만난 백은선 시인은 “(첫 산문집에서 말한 것처럼) 산문집을 다시는 안 내려고 했는데, 그 이후에 산문 청탁이 많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렇게 쓴 산문들을 모았는데 하나의 공통점으로 묶이지 않았다. 그때 난다의 유성원 편집자가 “어떠한 형식도 좋다”며 ‘시의적절’ 시리즈로 내는 것을 제안했다.
『뾰』는 시집도 산문집도 아니다. 시인의 글을 하루 한편씩 읽을 수 있도록 모아 매달 책 한권으로 펴내는 출판사 난다의 시리즈 ‘시의적절’의 8월호다. 그래서 백은선의 산문과 시는 물론 일기, 단상, 편지, 단편소설까지 실려있다. 지난해 난다의 대표 김민정 시인의 1월호를 시작으로, 전익진·신이인 시인과 오은·서효인·유희경 시인 등이 각각 한 달에 한권씩 열두달을 채웠다.
『뾰』라는 제목은 유 편집자가 추천했다. 이날 인터뷰에 시인과 함께 자리한 편집자는 “「뾰」라는 시가 너무 좋았다. 백은선 시인이 한 글자 제목의 책을 가지게 된다면, 『뾰』 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특히 “사랑스러운 제목과 싱그러운 자두 이미지로 인해 이 책을 집어든 무방비 상태의 독자들이, 시인의 매력에 빠지기를” 바랐다.

독자들은 단상(斷想)에서 「뾰」의 집필 계기를 읽은 후에야 표제작 「뾰」를 만나게 된다. 시는 “입을 꿰매주는, 세상에 하나뿐인 가게를 찾아 떠나는” 내용이다. 시인은 “의도한 순서다. 그렇지만 시는 항상 의도를 배반하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시를 쓰게 된 계기와 실제 시 「뾰」는 무관하다고 생각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가 단상에 밝혔듯 「뾰」는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을 읽은 독자의 악평을 보고 울며 쓰기 시작한 시다. 그러나 「뾰」라는 시에서 울분과 화가 느껴지진 않는다. 백 시인에 따르면 “시인은 어디로 시가 나아갈지 모르는 채로 쓰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내 안에 들이고 싶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토해내듯 다 꺼내보이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을 「뾰」라는 시로 보여주려 했다.”
시와 산문을 번갈아 읽다보면 백은선 시인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시인은 “산문을 쓸 땐 더 솔직하고 가감 없이”썼고, “시를 쓸 땐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지 않느냐”를 더 고심했다. “시를 쓸 땐 미지(未知)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능세계』에서 멀어지며 ‘시가 친절해졌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 생각엔 엄마가 되어 더 다정해지고, 수다스러워지고, 밝아져서 그런 것 같다. 처음엔 그 변화가 싫어 부정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별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백은선 시인은 올해 11살 된 아이와 함께 살고있다. 쉬운 언어를 사용하고, 동요와 동화책을 자주 접한다. 엄마로서 살아가며 생긴 변화는 이런 데서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지난 산문집을 쓸 때와 비교하면 삶의 안정감이 달라졌다. “『나는 내가 싫고..』를 쓸 땐 이혼 중인 상태였다. 그래서 좀 미쳐있었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는 “이제 혼자가 된 지 오래되어 건강하고 안정적인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뾰』에는 시에 대한 글이 자주 등장한다. 11월 출간을 앞둔 시집의 시를 쓰던 시기와 『뾰』를 쓰던 시기가 겹쳤다. 백 시인은 지금 생각하는 이상(理想)적인 시에 대해 “매번 바뀌지만, 지금은 공백으로서 이야기하는 시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시의 기둥이 되어주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시가 가진 공백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뾰』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루 한편씩, 글이 쓰여진대로 음미하는 것이다. 8월을 내리 함께할 독자들에게 백은선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살다보면 살아진다. 그것의 증거가 되고 싶다”고. “매일매일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는 책이 됐으면 좋겠다.”
이제 그는 2년 만에 돌아올 다음 시집을 준비 중이다. 11월 출간될 시집엔 『뾰』에서 밝힌 반복되는 꿈의 이미지와 그간 모아낸 장면들을 시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