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윤호의 아메리칸 오딧세이] 다시 불붙은 반유대주의

구호는 정의를 가장하고, 행동은 분노를 배설한다. 미국에서 다시 불붙은 반유대주의가 그렇다. 극우의 시대착오적 인종혐오가 이젠 좌파의 가면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때로는 교묘하고, 때로는 포악한 얼굴을 하고 말이다.
진보의 지적 아이콘 노엄 촘스키(97)가 공저로 쓴 『팔레스타인론』(2015)을 보자. 이스라엘을 식민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팔레스타인의 투쟁을 정당화했다. 서문에 2014년 이스라엘이 180만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융단폭격을 했다고 나온다. 폭탄을 쏟아부어 한 지역 전체를 쓸어버린다는 융단폭격이라는 말을 두 번 썼다.
좌파 반유대주의, 이스라엘을 나치에 비유

복수의 국제조사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군이 사용한 폭탄의 80~90%가 정밀유도탄이었다. 하마스의 무기고, 지휘부, 로켓 발사대가 목표물이었다. 하마스의 인간방패 전술 탓에 민간인 피해가 컸지만, 융단폭격이 아니었다. 출간 10년이 지나도록 이 말은 그대로 실려 있다. 서문은 프랑스 작가 프랑크 바라가 썼다. 촘스키가 진실을 중시한다면, 공저자의 오류를 수정했을 텐데 내버려둔 것은 고의성을 의심케 한다. 허위 이미지가 묵은 얼룩처럼 독자의 머릿속에 들러붙길 바란 듯하지 않나.
흔히 반시온주의와 반유대주의는 다르다지만, 현실에선 서로 뒤엉킨다. 반시온주의는 이스라엘을 부정하고,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을 혐오한다. 이를 분리해 생각하고 행동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혐한을 하는 일본인이 한국인을 존중하고, 혐중을 외치는 한국인이 중국인을 좋아하겠나. 또 이스라엘을 점령국으로 비난한다면, 50년 전부터 북키프로스를 점령해온 터키도 규탄해야 한다. 그런 균형 잡힌 반시온주의자는 볼 수 없다.
캠퍼스의 반유대주의는 홍위병처럼 난폭한 집단행동으로 나타난다. 2023년 10월 UC버클리 로스쿨 학장 어윈 체머런스키(72)에 대한 좌파 학생들의 공격이 그랬다. 진보 법학자인 그는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지지해왔다. 네타냐후 정부의 강경책엔 반대하지만 이스라엘인도 민족자결권을 갖는다고 봤다. 이를 빌미로 반유대주의 좌파가 그를 ‘집단학살의 공범’이라며 인신공격을 했다. 체머런스키 부부가 집에서 로스쿨 학생 초청 만찬을 하던 날 ‘팔레스타인 정의를 위한 학생들’(SJP)이 들이닥쳐 시위를 했다. 집밖엔 피 묻은 나이프와 포크를 든 체머런스키의 포스터를 뿌려댔다. 학장 부부가 수차례 나가라고 했으나 그들은 표현의 자유라고 우기면서 식사를 방해했다.
체머런스키가 그런 봉변을 당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는 2003년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촌 철거에 반대하다 이스라엘군 불도저에 깔려 숨진 미국인 평화운동가 레이철 코리의 유족 측 변호를 맡았다. 그때 팔레스타인 피해자들도 변호해 미국의 불도저 메이커를 상대로 소송을 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좌파 반유대주의의 공격을 받았으니 충격이 심할 수밖에. 그는 며칠 뒤 이 경험을 LA타임스에 기고하면서 “캠퍼스에 만연한 반유대주의를 규탄해야 한다”고 썼다.
2024년 봄 컬럼비아대에선 더욱 부조리한 상황이 벌어졌다. 반유대주의 시위대가 해밀턴홀을 점거할 때였다. 안에서 일하던 청소부 마리오 토레스와 레스터 윌슨이 막아보려다 제압당했다. 학생들은 이들을 “유대인 편드는 놈” “시오니스트”라고 욕하며 감금 폭행했다. 토레스는 라티노, 윌슨은 흑인이었다. 둘은 대학을 연방기회균등고용위원회(EEOC)에 제소해 지난 7월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이와 별도로 대학 측은 유대인 교직원과 학생들에게도 반유대주의의 피해에 대해 2100만 달러를 배상키로 EEOC와 합의했다. 종교적 차별로 인한 배상으론 사상 최대 액수다. EEOC의 안드레아 루카스 위원장 직무대행은 “나치 독일에서나 볼 법한 일”이라고 했다.
해밀턴홀에 난입하다 체포된 이 중에 제임스 칼슨(41)이란 자가 있다. 뉴욕에 230만 달러짜리 방 4개의 타운하우스를 소유한 백인이다. 부유한 좌파는 폭력을 휘두르고, 시급 19달러의 청소부는 개돼지처럼 두들겨 맞는 게 반유대주의의 민낯이다.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혐오범죄는 2024년 1만1679건으로 전년보다 183건 감소했다. 하지만 유대인 대상 혐오범죄는 사상 최대인 1938건에 달했다. 하루 5건이 넘는다. 범죄는 아니지만 방송이나 SNS에선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 테러 직후 컬럼비아대 교수 조셉 마사드는 “대단한 공격”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또 정치학자 조디 딘은 “절망 속의 사람들을 해방시킬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했다. 예일대 인류학자 자리나 그레왈은 “이스라엘 정착민은 민간인이 아니다”며 테러를 합리화했다. 코넬대 교수 러셀 릭포드는 “벅차다”고 했다. 지난 5월 워싱턴DC에서 주미 이스라엘 대사관 직원 둘이 테러범에 살해됐을 때 외려 희생자를 시온주의자로 비난하는 이도 있었다. 여성과 동성애를 혐오하고 인종주의적 색채가 강한 하마스를, 진보 호소인들은 한없이 추켜세운다. 좌파 반유대주의는 표현의 자유를 방패 삼아 봄날을 구가하고 있다.
이들이 합리화한 하마스의 테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인구 980만의 이스라엘에서 1200명이 살해됐다. 인구 센서스를 기준으로 미국에 비견하면 하루 새 미국인 4만여 명이 살해된 셈이다. 9·11 테러가 14번쯤 동시에 일어났다고 상상해보라. 다음날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친팔레스타인 시위는 그 상처의 깊이와 고통을 무시한 채 뿌려댄 소금이었다.
그들의 구호엔 허구가 많다. 흔히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를 매도하곤 하는데, 현실은 다르다. 지난해 이스라엘의 비유대인 인구는 265만3000명이다. 1948년 건국 이후 17배로 늘었다. 또 15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대법원엔 무슬림 아랍인 할레드 카붑(67)이 대법관으로 재직 중이다. 그가 첫 번째도 아니다. 이게 아파르트헤이트인가. 아랍 어느 국가보다 개방적이고 진보적 아닌가. 인종적 증오에 반대하는 게 기본 도덕률인데도 반유대주의는 선택적으로 눈을 감는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무슬림 탄압이나 아랍 왕정국가들의 인권 문제엔 침묵한다.
반유대주의는 이스라엘을 나치에 비유하기도 한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나라를 말이다. 상징 위상의 역전은 1967년 6일 전쟁 이후부터라는 게 정설이다. 이때의 승리로 이스라엘은 이집트·요르단·시리아의 영토 안으로 점령지역을 확대했다. 이스라엘이 식민주의 점령자로, 팔레스타인이 피억압자로 반전된 순간이다. 정작 히틀러와 손잡고 중동의 유대인을 청소하려 했던 건 팔레스타인의 종교 지도자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1897~1974)였다. 1948년 유대인 말살을 촉구하며 지하드를 선포했다. 지금도 이스라엘군이 가자 지구를 수색할 때 『나의 투쟁』 아랍어판을 자주 발견한다고 한다.
좌파의 공상적 서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미 제국주의 대리자, 유대인은 백인 가해자의 배역을 맡는다. 하마스는 타락한 적에 맞선 영웅적 저항세력으로 포장된다. 얼마나 약자인가에 도덕성을 연동시킴으로써 테러리스트까지 선한 사람으로 치켜세운다. 좌파는 스스로의 욕망을 팔레스타인에 투사해 자기만의 오리엔탈리즘을 구축했다.
한물갔다 싶던 우파 반유대주의도 고개를 들고 있다. 마가(MAGA) 진영의 방송인 터커 칼슨(56)이 부쩍 수상해졌다. 지난 9월 암살당한 찰리 커크의 장례식에서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자들을 가리켜 “후무스를 먹으며”라고 했다. 유대인을 지목한 것이다. 얼마 뒤 극우 반유대주의자 닉 푸엔테스와 인터뷰하며 맞장구를 쳐줬다. 미국을 중동에 끌어들이는 이스라엘에 대해 반감도 곁들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허튼소리”라면서도 분명히 선을 긋진 않았다.
지난 3월 갤럽에 따르면 공화당 지지자의 83%가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반면, 민주당 지지자에선 33%만이 같은 반응이었다. 보수의 친이스라엘 여론이 압도적이지만, 극단적 소수도 있다.
정작 히틀러 손잡은 건 팔레스타인 지도자

문제는 극단을 제어할 리더가 안 보인다는 점이다. 한 달쯤 전 JD 밴스 부통령이 보수 청년단체 터닝 포인트USA 행사에 참석했을 때였다. 붉은색MAGA 모자를 쓴 학생이 발언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인종 청소를 왜 미국이 지원하는지 혼란스럽다.” 답변하기도 전에 환호가 터져나왔다. 마치 좌파에서처럼. 밴스는 단호한 반박 대신 “이스라엘이 미국 대통령을 조종한다던데, 이번 대통령은 아니다”며 빠져나갔다. 반시온주의에 박수친 학생들과 슬금슬금 말을 돌린 밴스에게, 합리적 보수층이라면 두 번 낙담했을 법하다.
반유대주의를 비판한 1947년도 영화 ‘신사협정’에서 주인공 필 그린(그레고리 펙)은 말했다. “반유대주의가 저 멀리 어둠 속 야만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걸 키우는 건 착한 사람들이요.” 요즘 미국엔 그린이 말한 착한 사람, 아니 착한 척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남윤호 미주중앙일보 대표가 현지에서 전합니다.

남윤호 미주중앙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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