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홍빛 블라우스와 화려한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여인이 의자에 앉았다. 뒤로는 붉고 노란 단풍이 흐드러진다. 대담한 붓질과 강렬한 색채의 대비로 깊은 가을의 서정을 전하는 그림 ‘가을의 여인’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운창(雲昌) 임직순(1921~1996)의 1974년 작품이다. 훗날 천경자(1924~2015)의 며느리가 된 유인숙 씨가 그림 속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작품은 평생에 걸쳐 생동감 넘치는 여인과 꽃의 세계를 그렸던 임직순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겼다. 임직순은 특히 의자에 앉은 여인의 ‘좌상’을 자주 그렸는데 이중 1957년작은 제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대통령상의 영예를 그에게 안기며 당대 좌상화 유행을 이끌기도 했다.
한국 구상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인 임직순의 개인전이 다음 달 5일까지 서울 원서동 예화랑에서 열린다. 2022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색채의 마술사 임직순’ 이후 약 3년 여 만이다.

전시에서는 임직순을 대표하는 꽃과 여인 소재의 회화를 비롯해 한국의 산천을 그린 수채화와 유화,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시절에 그린 드로잉과 판화 등 1970~1980년대 작품 56점을 선보인다. 시작점은 그의 예술 세계의 중대한 전환기로 여겨지는 1973년 파리 체류 시절이다. 화백은 당시 조선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일본 미쓰비시 한국 지사장이 유럽 사장으로 발령나면서 파리에서의 활동을 지원한다. 화백은 1년간 파리에 머물며 세계 미술 흐름을 접했고 눈에 보이는 색채의 조화에만 몰두했던 화면을 넘어 내면의 본질적 빛을 탐구하는 인상파적 화풍을 완성한다.


갤러리 2개 층에 걸쳐 이뤄지는 전시에서 작가의 파리 시절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은 2층이다. 화백은 1973년 파리 ‘모네 앤 페트리’ 갤러리에서 개최한 개인전 홍보를 위해 포스터를 200장 한정 판화로 제작했는데 이곳에 전시돼 있다. 유럽 곳곳의 풍경을 담은 스케치와 세계적 조각가 문신의 파리 작업실을 방문해 남긴 스케치도 함께해 눈길을 끈다.
1974년 한국으로 돌아온 화백은 왕성한 활동을 재개하는데 이중 대표작을 1층에 모았다. 화백에게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안겨준 강렬한 색감의 꽃과 여인의 그림을 수채화, 유화, 스케치 등으로 다채롭게 만나볼 수 있는 가운데 화백의 자화상 한 점이 눈에 띈다. 화백의 큰 며느리이자 작가인 조혜숙 씨는 작품에 대해 “아버님이 파리에 머물던 시절 비슷한 자화상을 한 점 그려 파리 전시회에 선보였는데 개막 당일 팔렸다. 너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서운해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그린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작품에는 서명이 없는데 ‘두 번 다시 팔지 않겠다’는 결심이 담긴 것으로 추측된다.
이번 전시에는 캔버스 작품뿐 아니라 펜과 연필, 콩테, 수채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종이 드로잉이 대거 공개됐다. 김방은 예화랑 대표는 “화백은 인물화나 풍경화를 그릴 때 반드시 실제로 본 후 그 감동을 화면에 옮기는 인상주의적 작업을 했기에 스케치가 굉장히 많고 직접 서명을 남길 정도로 완성도도 높다”며 “임직순의 다양한 면모를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