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게 잘린 나무들 사이에서 피아노를 조립하는 장인의 뒷모습, 돌로 된 작품의 포장을 조심스럽게 벗겨내는 전시장의 사람들, 레스토랑 주방에서 요리에 몰두한 사람들….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박진아(51) 개인전 ‘돌과 연기와 피아노’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한순간을 담은 그림 40여 점이 나왔다. 리모델링을 앞두고 마지막 그룹전을 연 2023년의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에 참여했을 때 작가는 설치업체 직원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정확한 설치를 위해 설명서를 확인해 가며 돌 작품을 이리저리 옮기거나, 전시장에 붙일 시트지를 준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완성된 전시를 보게 될 관객들은 접할 수 없는 이 막후의 시간을 카메라에 담았고, 후에 이들 장면을 재조합해 캔버스에 그렸다. ‘연기’에 비유한 장면들은 국제갤러리에 있는 레스토랑 주방의 분주한 모습이다. 스테인리스스틸 주방 기기들의 직각이 만드는 회색, 매달린 황동색 프라이팬,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좁은 공간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작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난해 독일의 슈타인그래버 피아노 공장을 방문하고 그린 근작도 나왔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표지판 너머에 있을 듯한 장면들, 누군가가 무언가에 몰두한 그 순간이 박진아의 화폭에 남았다. 그는 “집중하고 있는 인물의 모습에는 잠깐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분위기가 있다. 그림에 시간을 담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의 그림에는 여러 시간이 들어 있다. 사진을 찍을 때의 시간, 찍어둔 사진을 나중에 봤을 때의 시간, 이 사진들을 조합하고 자기만의 색채와 구성으로 공들여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그렇다.
서울대 서양화과 졸업 후 런던 첼시 미술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박진아는 2008년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월광욕’ 하는 젊은이들을 로모카메라로 담은 뒤 그린 ‘문탠(moon tan)’ 시리즈는 30대 젊은 화가의 신선한 시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밤에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스냅사진은 눈으로 본 모습과 달라 “기계를 통과한 풍경의 낯섦을 보여준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어 2010년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플라토 등에서 전시했다. 서울 연남동과 독일 뉘른베르크 작업실을 오가며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에는 없는 게 많다. 주방의 냄새와 소음도, 피아노 공장의 소리도 없다. 여럿이 등장하지만 주인공도, 이야기나 사건도 없다. 인물의 얼굴이나 표정도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만 있는 것도 있다. 완성된 피아노, 손님에게 내놓은 요리, 전시장의 작품에는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노력, 과정의 시간이다.
실은 우리 일상이 그렇다. 하잘것없는 순간이 모여 오늘을 이룬다. “사이의 순간을 그린다”는 화가는 주연을 위한 무대도 아니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백스테이지도 아닌 사이의 공간이자 미완의 시간을 포착했다.
피아노 제작의 마지막 단계도 이색적이다. 박진아는 "피아노 공장은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완성품에 가까워졌다. 맨 위층의 피아노는 마지막으로 길들이는 과정을 거친다. 기계에 연결해 밤새도록 피아노를 치게 한 뒤 출고된다.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밤새 연주되는 피아노, 이 소리 없는 그림은 국제갤러리 한옥의 윈도 전시장에 걸려 전시를 다 보고 나갈 때 보인다. 그는 “관객이 그림을 볼 때 어떤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듯, 흐르는 시간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늘 똑같이 흐르던 시간이 새삼 눈에 보이는 연말·연초, 음력으로는 아직 2024년인 사이의 시간이다. 오늘 몰두의 순간은 내일 어떻게 기억될까. 26일까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