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오락가락하는 가을 날씨가 농민들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한창 붉게 물들어가야 할 사과가 며칠 비로 인해 푸르게 변했다는 소리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조금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작년에 비해 배추값은 여전히 고공행진이고, 쪽파김치라도 담그려 집어든 쪽파 한 단 가격이 작년 이맘때의 두 배도 더 되는 듯하다. 농업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조선에 비해 매우 낮은 시대지만, 시골에 사는 나는 추수기 날씨마저 불안불안하다.
나라경제 대부분을 농업에 의지했던 1581년 음력 9월, 예안 고을(현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일대) 상황은 더 엄혹했다. 당시 예안 고을 대표적인 양반 가운데 한 명인 금난수의 기록에 따르면, 고을 사정은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백성들 입장에서는 가을이 그나마 가장 사정이 좋을 때였다. 그러나 1581년은 유난히 자연재해가 많아, 가을에도 곡식 한 자락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마치 3~4월 보릿고개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집이 한둘이 아니었고, 기근으로 인해 굶어 죽는 사람까지 나왔다.
조선시대 가을 기근은 엄청난 재난의 서곡이다. 가을 추수로 겨울을 넘겨야, 보릿고개를 이길 힘을 얻기 때문이다. 정상적이라 해도 3~4월이면 보릿고개를 맞기 마련인데, 가을부터 양식을 구하기 힘들다면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폭증할 수밖에 없다.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은 늘고, 날씨가 조금만 바뀌어도 대규모 전염병이 닥쳤다. 곡식을 구하거나 전염병을 피해 고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한 집 건너 곡소리가 들리면, 고을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하게 될 터였다. 최소한 이듬해 5월 보리 수확기까지 백성들이 겪어야 할 일이었다.
결국 예안현감 이준종이 파직되었다. 가을에 굶어 죽는 백성이 나왔다는 소식은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도망치듯 급히 떠나려는 이준종을 붙들고 조촐하게나마 전별연을 베푼 금난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위로했지만, 이준종 입장에서는 이만저만 억울한 게 아니었을 터였다. 자연재해가 수령 탓도 아니었고, 자연재해가 불러온 엄혹한 상황도 수령이 의도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자연재해까지 수령이 책임져야 한다면 ‘누가 수령을 할지’ 걱정될 만도 했다(금난수, <성재일기>).
그러나 조선시대 관념에 따르면, 자연재해도 수령의 책임이었다. 왕명을 받아 지역에서 왕권을 대리했던 지방관의 중요 임무 일곱 가지를 규정한 ‘수령칠사(守令七事)’는 농업으로 대표되는 경제문제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었다. 백성들이 그 고을을 떠나지 않아야 했고, 이왕이면 먹고살 만한 마을을 만들어 호구가 증가할 수 있도록 다스리는 게 두 번째를 차지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렇게 되어야 교육이나 부역, 세금의 문제도 잘될 수 있으니, 수령칠사의 핵심은 고을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굶어 죽는 사람까지 나왔으니, 파직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물론 이준종의 파직은 자연재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게 아니었다. 지방 수령이라면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최소한 굶어 죽는 백성들이 없도록 막아야 했다. 자연재해 발생을 염두에 둬 넉넉할 때 조금이라도 고을 창고를 채우고, 긴급상황이 벌어졌을 때 수령의 권한을 가동해 이를 해결하는 게 지방관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재해 핑계만 대면서 백성들이 굶어 죽는 게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지방관이 있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폐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재해가 지방관 책임은 아니겠지만, 자연재해마저 자기 책임으로 인식하고 여기에 대비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배추값 폭등이 이상고온 탓이고, 잡히지 않는 물가가 국제경제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자기 책임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국가 통치자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