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객원교수 이종호 - ‘제2의 탈원전’ 논란, 전문가에 들어보니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원전 추가 건설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면서 “제2의 탈원전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앞서 한국은 체코에 원전을 수주하면서 미 웨스팅하우스(WEC)와 ‘노예계약’을 맺었다는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서울대(학사)·도쿄대(박사)에서 원자력공학을 전공하고 원전업계에서 35년간 재직한 ‘원전맨’ 이종호 서울대 객원교수(전 한국수력원자력 기술본부장)를 만났다. 한·미 원자력 협력의 근간이 된 1997년 LA(기술사용협정) 협상을 주도했고 2012년 우리 고유 개발 원자로인 APR1400의 인증을 위한 WEC와의 협력 계약에도 책임자로 활약한 그는 원전의 효율성만큼이나 절차와 안전을 중시한다.
원전, 7년이면 완공…건설기술 세계 최고
국민 합의하면 10기 이상 지을 땅 있어
47조 손실 낸 문 정부 탈원전 답습 말길
‘노예계약’, 미 통제 거부 탓…대안 찾아야

“탈원전으로 심사 기간 2년→9년”
이 대통령이 “원자력 발전소 짓는 데 최하 15년이 걸린다”고 했는데요.
“누군가 대통령에게 잘못된 정보를 보고한 듯합니다. 부지 확보 기간을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국내 기술로 원전 짓는 기간은 늦어도 7년이면 충분합니다. 2010년대 초 준공된 신고리 1·2호기는 5~6년 만에 완공했었죠. 최근엔 주 52시간 근무제 등 안전 중시 문화를 반영해 공기를 늦춘 결과 7년으로 추산하죠.”
최근 완공된 신한울 1·2호기는 각각 10년, 12년이 걸렸는데요.
“그건 이유가 다릅니다. 한수원이 2014년 신한울 1·2호기 운영 허가를 신청했는데 심사 기간이 무려 7~9년이 걸렸어요. 과거엔 2년이면 허가가 나왔는데 경주 지진도 한 원인이었지만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에 따른 심사 지연이 핵심 원인이 돼 늦어진 거죠. 신한울 1·2호기는 신고리 3·4호기처럼 우리가 자체 개발한 APR1400 모델로, 정부 산하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이미 안전성을 인정한 것인데도 그렇게 길게 걸렸어요.”
대통령은 “SMR(소형원자로모듈)도 아직 기술 개발이 안 됐다”고 했는데요.
“SMR은 우리가 미국·중국 등보다 기술개발이 2~3년 늦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반복 건설’ 경험으로 공급 인프라가 앞서 있어 세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죠. 최근 SMR 업체를 세운 빌 게이츠가 방한해 두산에너빌리티·HD현대건설 사장을 만났고, 오클로·X-에너지 등 미국 유수 업체들도 국내 업체와 SMR 협력 MOU를 체결했어요. (‘반복건설 경험’은 뭡니까?) 미국·프랑스 등은 수십년간 원전 건설을 중단했다가 재개했지만 한국은 원전을 지속해서 건설해온 유일한 나라라 노하우가 탁월해요. APR-1400 원전을 UAE와 체코에 6개 수출했고 국내에도 8개를 건설했는데 같은 기종 원전을 14기나 건설한 나라는 서방에서 한국이 유일하죠.”
대통령은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원전이 부응하려면 30개 넘게 지어야 한다. 어디 지을 거냐”고 했는데요.
“부지 확보가 녹록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우리는 국토가 좁아 원전 밀도가 세계 1위죠, 그런데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역시 전체 에너지 발전량 중 비중은 9%뿐인데도 밀도는 이미 세계 3위입니다. 정부 구상대로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를 전체 에너지 발전량의 50%까지 늘린다면 태양광은 발전 용량이 현재 30GW에서 315GW로 부지가 10배 이상 늘어나 밀도가 세계 1위가 될 겁니다. 즉 부지 확보는 원전뿐 아니라 재생에너지도 똑같이 어려운 거죠. 다만 원전은 현재 10기까지는 더 지을 부지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어디인가요?) 영덕·삼척 등 원전을 지으려다 취소된 부지 2곳을 살리면 모두 8개 원전을 지을 수가 있고, 울산 세울 원전에도 2기를 더 세울 부지가 마련돼있어요. 게다가 폐기되는 석탄 화력 발전소 부지나 산업단지 주변에 SMR을 건설한다면 30GW는 거뜬히 공급할 수 있습니다. 국민 합의만 있으면 돼요.”
“전기료, 원전 58원 vs 태양광 196원”
대통령은 “당장 엄청난 전력을 신속 공급할 에너지는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라고 했는데요.
“태양광·풍력은 24시간 발전이 불가능하고, 기후에 의존적이며 고비용이에요. 재생에너지 비중이 82%인 스페인의 12시간 전국 대정전 사태가 증명하죠. 태양광으로 낮에 발전해 만든 전기를 저녁에 쓰려면 배터리에 저장해야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요. 태양광 많이 쓰는 독일·덴마크는 전기요금이 다른 유럽국가보다 50% 이상 비싼 반면 원전 비중이 큰 핀란드·스위스는 무탄소 비중은 높은데 전기요금은 낮습니다. 우리는 태양광·풍력에 비해 원전의 가성비가 월등합니다. 지난 5년간 원전이 한전에 전기를 공급한 평균 단가는 ㎾h당 58원인데 태양광은 196원으로 3배가 넘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되면서 전기 수요가 2030년까지 미국이 5배 폭증하고, 우리도 급증할 현실을 고려해야죠.”
문재인 정부 시절 탈원전으로 인한 손실 규모는요?
“전력은 당장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원전 비중이 줄면서 전기 요금이 폭등했습니다. 2010년대 초만 해도 연간 10기쯤 원전을 지었는데 탈원전으로 2026년 기준 2기(새울 3·4호기)만 짓는 수준으로 급락했죠. 원전 운전 지연 등에 따라 한전의 비용이 47조원이나 늘었다는 추정도 있어요.”
대통령 발언이 ‘제2의 탈원전 신호탄’이라는 주장도 있는데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선거 운동 기간에 ‘현실을 고려하면 원전이 필요하며, 바람직한 전원 믹스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발언은 여러 가지 고민 중에 나온 말로 봅니다. 다만 대통령도 과거 TV토론에서 거론했던 ‘RE100’(재생에너지 100%) 운동을 주도하던 영국의 클라이미트 그룹(Climate Group)이 지난해부터 재생에너지만으로는 탄소 중립 달성이 어렵다고 깨달아 원전을 탄소 중립 수단에 포함했어요. 구글·아마존·MS 등이 원전에 거액을 투자하는 것도 원전이 저비용은 물론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수원·한전이 체코에 원전 2기를 수주하며 WEC와 ‘노예 계약’을 했다는 논란이 거셉니다. 원전 1기 수출시 ▶로열티 2400억원 지급 ▶기자재 구매(9000억원) ▶수출 제한 준수 규정에 합의했기 때문인데요.
“미래를 열기보다는 족쇄입니다. 특히 유럽·북미 시장 수출을 50년간 제한당한 게 안타깝습니다. (이런 계약이 맺어진 이유는요?) 전문성과 지적재산권 이해가 부족했고 신뢰 구축도 미흡했던 때문이죠. 내가 알기로는 한·미 원자력 협력의 바탕인 ‘(핵확산 방지용) 수출통제’ 준수에 이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협상한 97년 협정에서 한국은 WEC 기술을 영구적으로 쓰는 대신 미국의 수출통제는 수용키로 했어요. 그런데 2015년에 한국이 3대 핵심 원전 기술 자립을 이루면서 ‘수출통제를 받지 않겠다’고 해 문제가 생긴 겁니다.”
“2017년 독자 수주 추진에 미국 뒤집혀”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한국은 2017년경 사우디아라비아에 원전을 (미국의 수출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 수주하려 했어요. 그러나 미 원자력법 123조에 따라 미국산 원천기술이 들어간 원전을 수출하려면 ‘원전을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한다’는 협정(123 협정)을 미국과 체결한 국가에만 해야 합니다. 사우디는 123 협정 체결국이 아니라 미국 입장에선 ‘위험 국가’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당시 우리 정부가 미국 에너지부에 ‘사우디에 원전을 독자 수주하겠다’고 통보하자 미 에너지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그 이후 한·미 원자력 고위급 회담 등 모든 협력도 중단됐다고 해요.”
2022년 10월께 WEC가 한국에 소송을 제기한 이유도 그와 관련 있나요?
“그런 상황에서 한국은 2017년경 체코 원전을 수주하려 했어요. 한국의 사우디 독자 진출 움직임에 놀란 미국과 WEC가 한국 측에 ‘체코 수주도 미국의 수출통제를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 관철되지 않으니, 소송을 제기한 거죠. 소문에 따르면 지난해 여름 한국이 체코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기 전후에 미 에너지부는 한국이 체코에 제출한 입찰서를 입수해 미 알곤 국립 원자력 연구소에 조사를 맡겼어요. 알곤 연구소가 한·미의 원자로 설계도를 대조해보니 OPR이라고 똑같은 시스템인 게 드러난 거예요. 미국이 한국 측에 ‘우리 거랑 똑같지 않냐’고 추궁하니까 한국 측이 한마디도 못 했다고 합니다. 미국산 원천기술을 쓰고 있음이 확인된 거죠. 당시 체코 원전 수주를 눈앞에 두고 있던 한수원은 진퇴양난에 처했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진상을 알게 된 용산(대통령실)은 ‘이제까지 문제없다고 거짓말했지? 반드시 성사시켜’라고 압박했다고 해요. 그 이후 우리 협상력이 땅에 떨어지면서 극히 불리한 계약이 체결된 거죠.”
대책은 뭘까요?
“미국은 원자로를 2050년까지 300GW나 신설할 계획입니다. 4000조원이 넘는 거대 시장 진출을 위해선 협정의 개정이 절실합니다. 재협상은 계약의 하자가 드러나지 않는 한 현실성이 없고 우리가 WEC를 인수하는 방안도 미국이 불허할 게 뻔하니 현실적 대안은 조인트 벤처(합작법인)입니다. 미국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우리 원전(APR1400)이 최대한 진출할 수 있도록 양국 정부가 협력체계 구축을 지원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