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김병로 대법원장과 조진만(3·4대)·민복기(5·6대) 대법원장 등은 국회에 출석해 질의 응답에 응했다.”

추미애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지난 13일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의 이석을 막으며 한 말이다. “삼권분립 체제를 가진 법치국가에서 재판 사항에 대해 법관을 감사 대상으로 삼아 증언대에 세운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조 대법원장을 85분간 강제로 앉혀 질의를 듣게 한 근거다.
해방 후 혼란기에 재임(1948~1957)한 가인(街人) 김병로 대법원장과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 시절의 조진만·민복기 대법원장 사례를 2025년에 적용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세 대법원장의 출석은 재판 사항과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 법조계에선 “이재명 정부를 해방 후 혼란기나 군사 정부보다 후퇴시키는 발언”이란 말이 나온다.
김병로, 국회에 법안 설명하러 출석…대통령 비판도
국회 회의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세 대법원장의 국회 출석 및 발언은 추 위원장의 주장과 차이가 크다. 우선 독립투사이자 정치가이자 법전편찬위원장이었던 김병로 대법원장의 경우 국회가 강제로 불러내서가 아니라, 법안 또는 현안을 설명·지적하기 위해 찾곤 했다. 증인이 아니므로 증인 선서같은 것도 요구받지 않았다.

이를테면 1949년 7월 30일 국회 본회의가 대표적이다. 삼권분립을 천명한 제헌 후 1년 넘어서야 법원조직법이 상정된 날이었다. 국회 연단에 선 김 대법원장은 “사법을 운영하는 데 있어 더 지연되는 것을 도저히 사정상으로 허락하지 못하게 된 요새”라고 먼저 늑장 상정을 지적한 뒤 법안에 대한 사법부 입장을 설명했다.
약 3200자 발언 후 잠시 정회했다가 재개한 같은 날 본회의에 김 대법원장은 또 연단에 섰다. 이번엔 자신이 추천한 반민족행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 후보자 2명의 이력을 직접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김 대법원장의 발언 후 국회는 즉시 표결을 진행했고 반대표는 각 1표·0표밖에 나오지 않은, 압도적 찬성으로 선출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연임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벌였을 때도 김 대법원장은 국회 본회의(1952년 2월 21일)에 나와 “법리와 절차가 없어서 불가하다”는 취지를 밝혔다. 이 당시 의원들은 “국가 만년대계를 그릇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대법원장께서 잘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요청한다”(이진수 민주국민당 의원)며 사법 수장의 발언을 경청했다.
박정희 정부 때 첫 국감 출석
국정감사에 대법원장이 출석한 건 국회 기록상 1968년 10월 1일이 처음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와 박정희 정부에서 임명된 조진만 대법원장을 상대로 여당(민주공화당) 소속 김장섭 법사위원장이 열었다. 하지만 이때도 김 위원장은 “정책질의”라는 점을 강조했고 의원들도 “구체적인 사건을 담당한 심판관에게 이런 말 저런 말은 삼가야 할 줄 안다”(박한상 신민당 의원)고 했다.
실제 질문들도 “법원행정당국의 민사사건 중시, 형사사건 경시에 대해서 어떻게 시정을 해나가겠는가”(박 의원), “단위법원을 새로 만들어서 재판사무 복잡성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고재필 민주공화당 의원) 등이었다. 감사 마무리 무렵엔, 퇴임을 앞둔 조 대법원장을 향해 “법사위원 일동 전원은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겠다”(김 위원장)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후임인 민복기 대법원장도 1970년 10월 19일 국정감사장에 섰다. 이때 역시 노재필(민주공화당) 법사위원장은 서두에 감사 목적을 “법원 행정사무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또 국회에서 책정·통과시킨 예산을 유효적절하게 시행하고 있는지” 등으로 한정했고, 의원들은 재판에 관해선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후 국정감사는 1972년 10월 유신(7차 개헌)으로 폐지됐다가 1987년 9차 개헌 때 부활했다. 민 대법원장을 끝으로 대법원장이 증언대에 서지 않은 관례는 13일 추미애 법사위에서 55년만에 깨졌다. 특정 재판을 캐묻거나, 면전에서 “사퇴 용의가 있냐”(박지원 민주당 의원)고 윽박지르는 모습은 이승만·박정희 정부 때도 없는 헌정사 첫 풍경으로 남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