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코엑스 더 플라츠홀에서 열린 문구페어 ‘인벤타리오’의 독립서점 유어마인드 부스에 방문한 함모(27)씨는 각종 빵이 그려져있는 책갈피를 들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와 1시간 정도 부스를 둘러봤다는 함씨는 “사람이 많아 지치지만 귀여운 문구들을 사서 좋다”며 들떠있었다.
‘인벤타리오’는 문구 브랜드 포인트오브뷰와 온·오프라인 기반 편집숍 29CM가 함께 기획한 문구페어로, 2일부터 6일까지 5일 간 진행됐다. 한국에서 민간 기업이 개최한 오프라인 문구페어는 이번이 처음이며, 총 69개 브랜드가 참여했다.
최근 문구에 쏠리는 MZ세대의 관심을 반영한 듯 이 행사는 1달 전부터 진행한 사전예매 단계에서 티켓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공개 첫날이던 2일엔 약 2000㎡(670평) 규모의 넓은 전시 공간이 관람객으로 꽉 들어찼고, 행사장 앞엔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100m 가까이 길게 늘어섰다. 인기 문구용품을 파는 부스 앞에는 긴 대기줄이 만들어져 구경만 하는데도 긴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행사를 기획한 포인트오브뷰는 문구 디자인 회사인 동시에 2022년 서울 성수동 연무장길에 문을 연 문구 편집샵의 이름이다. ‘어른들의 문방구’로도 불리는 이 매장은 지난해 기준 전년 대비 10배 이상의 거래액 상승을 기록하며 급성장 중이다.

문구 산업의 성장은 젊은 층 사이 불고 있는 ‘텍스트 힙’의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텍스트 힙’은 글을 뜻하는 ‘텍스트’와 멋지다는 뜻의 ‘힙’을 조합한 단어. 작년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신조어로 부상했다. 초기엔 멋져 보이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뜻으로 사용됐지만, 최근엔 ‘다방면으로 확장된 독서문화’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인벤타리오’에서 관심을 받은 문구들도 대부분 독서 관련 상품들이다. 포인트오브뷰와 『아무튼 문구』를 쓴 김규림 작가가 함께 만든 ‘책연필’은 책에 그어도 밑줄이 안 남는 투명색 색연필. 총 69개 부스 중 3분의 1가량이 책갈피, 북커버, 필사노트, 독서습관을 기록할 수 있는 메모지 등 책과 연관된 상품을 선보였다.
디자인 스튜디오 오이뮤가 인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와 함께 만든 ‘ㅊㅅㄹ’(첫사랑) 책갈피는 부스를 열자마자 동났다. 신소현 오이뮤 대표는 “최근 1년 사이 책과 관련한 제품의 매출이 3~4배 늘었다”며 “같은 문구 업계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판사 예스24도 문구페어에 참여해 책을 상징하는 향을 조향한 디퓨저 등을 판매했다. 김다연 예스24 상품기획파트장은 “도서 소비자와 문구 소비자가 많이 겹쳐있다고 생각한다”며 부스를 연 이유를 설명했다.

MZ세대 사이에서는 책이 ‘읽는 것’을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는 취미로 확장하는 모습이다. 스티커 등의 문구를 이용해 책을 취향에 맞게 꾸미거나(‘책꾸’) 관련 굿즈를 사 모으고, 작가가 나오는 북토크에 참여하는 것 등은 젊은 세대에게 널리 퍼진 ‘독서 문화’다.
함유지 문학동네 마케팅국 브랜드부문장은 작가 관련 팝업, 매주 시 한 편을 소개하는 뉴스레터 등을 직접 진행하며 그 변화를 체감했다. 함 부문장은 “독자의 반응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걸 여실히 느낀다”며 “진심 어린 도서 리뷰를 자신들의 SNS에 게시하고 출판사의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이 많다”고 전했다.

지난 1일 CGV에선 만우절 이벤트로 독립서점 콘셉트의 팝업 행사 ‘씨집책방’이 열렸다. 문학동네와 함께 큐레이팅한 책을 영화관 옆 대기공간에 서점처럼 비치해뒀다. 같은 날 이벤트의 일환으로 영화관에서 독서를 할 수 있게 만든 ‘독서관’도 열렸다.
15일까지 진행되는 ‘씨집책방’ 행사 첫날인 1일은『시선으로부터,』,『보건교사 안은영』 등을 쓴 정세랑 소설가가 사연에 맞는 책을 추천해주는 ‘정세랑의 문장’ 이벤트가 진행됐다. 신청자는 대부분 MZ세대였다. 정 작가에게 첫 번째로 책을 추천받은 최윤수(25)씨는 “좋아하는 책의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찾아다닌다”며 “정세랑 작가님의 소재와 표현력이 좋아 자주 읽었는데, 직접 만나 책을 추천받으니 의미가 깊다”는 소감을 밝혔다.

출판업계는 확장된 독서문화에 대응하며, 새롭게 유입된 독자층을 위한 노력 중이다. 북클럽과 SNS 운영 등 온오프라인 소통채널 확대에 힘을 쏟는 것이 대표적이다.
2011년부터 진행된 민음사의 연간 멤버십 서비스 ‘민음북클럽’은 지난해, 전년대비 회원수가 100% 이상 증가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편집자들이 선정한 글과 소장하고 싶은 굿즈를 모은 가입선물 ‘잡동산이’를 제공한 것이 성공요인이 됐다.
북클럽 회원을 대상으론 자체 북토크, 패밀리데이 등의 프로그램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진행된다. 민음사 마케팅부 조아란 부장은 “이미지나 극단적으로 짧은 영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글의 힘이 주목받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며 “마케터로서 새로운 세대의 독자들이 책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