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 2관왕 홍윤성의 패악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기세를 타 사람을 능멸하고 거만(巨萬)의 재물을 쌓아놓고도 노복(奴僕)으로 하여금 방자한 짓을 행하게 하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세조 14년 2월 25일)
동료 대신들의 탄핵을 받게 된 이 사람은 예조판서와 우의정을 지낸 홍윤성(1425~1475)이다. 문종 즉위년(1450)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25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불법과 악행으로 이름을 날렸고, 종국에는 인신(人臣)의 최고 지위 영의정을 거머쥔 인물이다. 기록된 행적만 보더라도 15세기 조선의 법치와 덕치 시스템이 이렇게 허술했나 하는 회의가 든다. 현실을 보는 힘을 갖추는 데는 역사만큼 좋은 교과서도 없을 것이다.
김종서 제거 등 세조 즉위 큰 공
술고래에 포악했으나 출셋길
종이 살인 저질러도 세조 비호
“홍윤성 죄목 애매” 책임 안 물어
부귀영화 누렸지만 사후 몰락
처와 첩 소송전 비석은 흩어져
수양대군 왕위 야욕 불 지펴

홍윤성의 존재는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어린 임금 주변에 충신과 간신이 뒤섞여 있는 혼란의 정국에서 공(公)이 부질없이 작은 절개를 지킨 들” 누가 알아주겠느냐고 한다. 대군의 찬탈 야욕에 불을 지핀 것이다. 이에 수양은 “자네는 나를 따라 처자(妻子)를 잊고 사직(社稷)을 위해 죽을 수 있나?”라고 묻는다. “이게 제 마음입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처자가 문제겠습니까.” 외려 놀란 세조가 “농담이었네!”라고 한다.(단종 즉위년 7월 25일) 관직에 입문한 지 1년 남짓한 27세의 홍윤성. 문관이지만 무재(武才)가 뛰어났던 그는 이렇게 해서 수양대군 세조의 심복이 되었다.
이로부터 1년 2개월이 흐른 후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안평대군 등을 제거함으로써 대권 가도를 달리는데, 그 핵심 요원의 하나가 홍윤성이다. 홍윤성은 ‘내란 평정’에 가담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봉해졌다. 이로부터 또 2년 후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자신을 도운 45명에게 차등 있게 훈공을 나누는데, 홍윤성은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봉해졌다. 이로써 홍윤성은 ‘공신 2관왕’이 되었고 국왕 세조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한다. 벼슬은 떼 놓은 당상. 과연 그는 세조의 즉위와 함께 예조참의 즉 정3품 당상관에 임명되었다. 탈취한 권력을 나눠갖고 전리품도 나눈다. 김종서의 차남 “김승벽의 아내 효의(孝義)는 예조참판 홍윤성에게 준다.”(세조 2년 9월 7일)
홍윤성은 세조로부터 경음당(鯨飮堂)이라는 별호까지 받은 ‘술고래’로 동료들은 한결같이 그를 거칠고 포악하다고 평했다. 관직을 받은 초기에 나주로 출장을 가서는 한 기녀를 강간했고 급제 동기 김호인(金好仁)과 언쟁이 붙자 사람을 시켜 그의 머리채를 잡아 거꾸러뜨렸다. 이 일로 사간원이 감찰 제수를 거부하자 그는 간원들의 집을 돌며 협박하였다. 또 예조판서 시절의 그는 평소 눈독을 들이던 고 김한(金汗)의 딸을 간(姦)할 목적으로 그 집에 쳐들어가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당시 김씨와 그 어머니는 이웃집으로 몸을 피했다.(세조 4년 7월 11일) 아내가 있던 33세의 홍윤성이 사족인 김씨를 강제로 간하여 첩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격분한 김씨의 어머니가 장고(狀告, 국가 기관에 서면으로 사실을 알리는 행위)하자 홍윤성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무산되었다. 이에 김씨의 오라비 김분과 김인이 고발장을 내는데, 사헌부와 사간헌 등의 관련 부서는 일제히 홍윤성 파면을 주장했다. 그의 행위는 어미의 상중(喪中)에 첩장가를 들고자 한 불효죄와 사족 여자를 강제로 취하려고 한 윤상죄에 해당되었다.
세조 “공신은 국가와 한 몸”

그런데 세조는 “술에 취해 잘못 들어간 것뿐으로 다른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한 홍윤성의 말에 따라 되레 김씨의 두 오라비를 ‘정승 모해죄’로 옥에 가두었다. 대신들이 들고일어났다. “홍윤성을 고발한 사람들만 옥에 갇히고 정작 그는 한 번도 조사를 받지 않으니 매우 불가합니다.” “홍윤성을 법대로 다스리기는커녕 사실마저 캐지 못하도록 명하시니 대소신민(大小臣民) 모두 분노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세조 4년 7월 13일) 또한 사헌부는 홍윤성이 술에 취해 모른다고 하지만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쳐들어간 것임을 밝혀내었다. “공신이라는 이유로 죄를 묻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홍윤성 같은 자도 문제가 안 되는데, 우리 같은 무식꾼이 법을 범한들 무슨 해(害)가 되겠는가?’ 할 것입니다. 지금 죄주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세조 4년 7월 28일) 세조는 외려 “공신은 국가와 한 몸이라 공신을 부정하는 것은 국가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못 박는다.
왕과 홍윤성의 위협으로 김씨의 오라비 김분과 김인은 “홍윤성이 술에 취해 잠만 잤다”며 거짓 자백을 하게 된다. 이것을 빌미로 세조는 “김분 등은 홍윤성이 그 누이에게 장가들려 한다고 무고하여 홍윤성을 모함했다. 그 죄가 가볍지 않으니, 모름지기 죽여야 하고 용서하지는 못한다”(세조 4년 8월 24일)라고 하였다. 누이를 능멸하고 어머니를 분노케 한 정승을 법에 호소한 대가가 사형이라니. 왕이 나서서 사건을 조작하니 아무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를 보고 있던 왕비 윤씨가 언문으로 의견을 전달했다. “김분 등이 범한 죄가 진실로 사죄(死罪)에 해당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먼 곳으로 유배하여 살길을 구해 주소서.” 왕은 즉시 그 글을 승정원에 내려보내 특별히 사형을 면하도록 했다. 부인에게 한 방 먹었다고 여겼는지 측근들에게 홍윤성의 일을 다시 물었다. “홍윤성은 진실로 옳지 못합니다.” 신숙주의 대답이었다.

그 후로도 홍윤성의 무례(無禮)를 탄핵하는 상소는 그치질 않았다. 그때마다 사건을 조작하고 상대를 음해하는 특유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그 가운데 압권은 고향 홍산(지금의 부여)에서의 만행이다. 1468년 1월 세조는 중궁 및 세자와 온양행궁에 거둥하여 2달 보름 여 동안 그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어가를 호위해간 문무관만 해도 60여 명에 이르렀다. 세조가 세상을 뜨기 6개월 전의 일이다. 그곳에 머문 지 한 달여, 2월 20일 새벽 3시경에 한 여자의 피맺힌 통곡이 궁궐 담을 넘어왔다. 홍산 정병(正兵) 나계문의 아내 윤덕녕이었다. 정승 홍윤성과 그 권세에 빌붙은 홍산 현감, 충청도 관찰사를 고발하기 위해 200리 길을 걸어 온 것이다. 왕 앞에 불려온 윤덕녕의 진술을 이러했다.
홍산 출신 홍윤성이 권세를 잡자 남의 재산을 침범하고 사람들을 이간질시키는 등 고을을 짓밟고, 그 종들의 위세 또한 수령을 능가하며 못하는 짓이 없으니, 지금 홍산은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종국에는 윤씨의 남편 나계문이 홍윤성의 비부(婢夫) 김돌산(金乭山) 등에게 맞아 죽었는데, 현감은 그들의 위세에 눌려 종범 세 사람만 가두고 주범 김돌산을 불문에 부쳤다. 게다가 홍윤성의 종들이 옥에 갇힌 종범까지 탈취해 갔는데, 누차 고소하자 겨우 잡아 다시 가두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관찰사가 모두를 풀어주고 되레 이 일을 고소한 친정 오빠 윤기와 시숙 나득경을 정승 모해죄로 얽어 공주 옥에 가두었다. 10년 전 사족 처녀의 오라비 김분과 김인을 다룬 솜씨와 매우 유사하다.
왕이 옥사 논의하자 꿩 10마리 바쳐
또 홍윤성 아비의 초상 때는 군인 200명을 동원하여 집 뒷산 소나무를 거의 다 베더니 며칠 뒤에는 군인 100여 명을 풀어 동산 안의 잡목을 자기 멋대로 다 베어냈다. 남편이 수십 년 기른 나무를 일시에 탈취당했는데도 호소할 데가 없었다. 도망한 장정이나 군졸이 모두 그 집에 있으면서 거칠게 날뛰니 홍산 사람 반이 그 권세에 붙좇아 있는 실정이었다. 현감 최윤도 사실은 홍윤성의 노복에 불과했다. 웬일로 왕은 신숙주 등에게 옥사를 의논하게 했다. 이때 접견이 금지된 홍윤성은 자신이 잡은 꿩(雉) 10수(首)를 사람을 시켜 왕에게 올렸다. “이것은 하사하신 매(鷹)로 잡은 것이라 신이 감히 맛보지 않고 즉시 바칩니다.” 사람들은 염치가 없는 재상이라며 비웃었다. 세조는 현감 최윤과 관찰사 김지경을 파면시키고 사건 관련자 수십 명을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왕은 “홍윤성의 죄목(罪目) 모두 애매하다”며 그 죄를 묻지 않았고 따로 불러 책망만 할 뿐이었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홍윤성에게 좌의정과 영의정이 차례로 주어지는데, 두 자리를 합해 얼추 1년을 누린 셈이다. 세조의 유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패악질을 일삼던 그의 삶도 죽음으로 끝난 듯싶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굴던 홍윤성은 나이 50에 발에 난 종기에 굴복하고 말았다. 삼정승을 지낸 사람의 졸기(卒記)에 ‘교만과 광망(狂妄, 미쳐 날뜀)’이라는 언어가 등장하기는 매우 이례적이 아닌가 한다. 그뿐 아니다. 관뚜껑이 닫히자 바로 처와 첩이 소송에 돌입했고, 후손도 끊겨 대대손손 꿈꾸던 부귀영화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홍산에 있는 그의 무덤은 잡목으로 뒤덮이고 성난 민심의 소행인지 비석은 깨진 채 흩어졌다.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