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로 세상읽기] 비극적 역사와 ‘기억투쟁’

2025-06-10

시간은 모든 것을 원자화하고 해체하는 마력이 있다. 과거의 사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총총히 사라지고 망각의 늪에 쉬이 빠진다. 기억되는 것은 이어지고 잊힌 것은 사라진다. 기억되어야 할 것이 사라지고 잊혀져야 할 것이 이어질 때 역사는 후퇴한다.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역사적 사건들이 있다. 비극적으로 아픈 역사일수록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지난 역사를 기억하지 않음은 그것으로부터 배우지 않음이다. 과거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선택적 기억과 집단적 망각은 역사 인식의 오류를 초래하고 비극적 경험을 반복하게 한다.

올해는 한국전쟁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반도에는 끝나지 않는 전쟁이 여전히 진행중이다. 전쟁을 겪은 세대를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반도 전역을 초토화한 이 전쟁은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우리 역사다. 그러나 반드시 잊지 않아야 하는 비극적 역사다. 기억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책무다.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은 일제 식민지배와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한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경험한 역사 인식을 토대로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라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그는 잘못된 비극의 역사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히 기억해야만 하는 고통들이 있음을 역설한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기억을 전제로 한다. 공유된 기억은 과거,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 기억은 사건을 항상 새로이 연결하고 관계망을 만들어내는 힘을 제공한다. 인간 역사와 서사 문화는 기억 때문에 이제껏 지속되어 왔다.

어제의 역사보다 오늘의 역사가 나으려면, 그리고 오늘의 역사보다 내일의 역사가 보다 희망적이려면 무자비한 학살과 처참한 전쟁으로 죽어간 무고한 이들의 고통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을 ‘기억투쟁’이라 한다. 북한 공산당의 침략으로 찢긴 산하와 민족적 내상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그 참화로부터 살아남은 이들과 그 후손들은 기억투쟁에 필히 참여해야 한다. 세월과 함께 잊혀 가는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지켜내려는 기억투쟁은 매우 중요하다.

예루살렘에 홀로코스트 박물관 ‘야드바셈(Yad Vashem)’이 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군에 의해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무참하게 희생된 대학살을 일컫는다. 야드바셈은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아들딸을 두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낫게 하여 주겠다. 그들의 이름이 잊히지 않도록, 영원한 명성을 그들에게 주겠다”(사 56:5, 새번역)라는 성경 구절에서 유래한다. 히브리어 ‘야드’는 ‘기억’이나 ‘기념’을, ‘바셈’은 ‘이름’을 각각 뜻한다.

이 박물관에는 학살된 유대인들이 남긴 각종 유품, 사진과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마지막 출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기억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나 망각은 우리를 다시 포로로 만든다.’

과거는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규정하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자기 정체성이 사라져 미래는 더욱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뼈아픈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망각은 불행과 폭력을 다시 불러내는 주술이고 비극적 전쟁과 전쟁의 참화를 재연하게 하는 시발점이다.

유대교 랍비 아브라함 헤셀은 말한다. “기억은 신앙의 근원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실제로 기억 없는 신앙이란 거의 상상하기 어렵다. 과거에 살아 역사하신 하나님을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기억하며 그 기억을 현재화하는 것이 신앙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유월절 의식을 통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 기억은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인식하게 하는 신앙의 요체다. 생생한 기억과 기념에 근거한 서사와 역사의식은 현시대의 비극을 끊고 미래 희망의 연대기를 쓰게 할 윤리적 실천이며 정신적 보루다.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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