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㊽ 전 국민 의료보험 실시

“가나는 건강보험 재정 기반이 충분히 확립되지 않아 가입률이 낮고 보장 범위가 충분하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한국의 제도 발전 과정, 운영 경험을 배워 (가나의) 발전을 모색할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지난 3~7일 한국의 건강보험을 배우기 위해 한국에 온 아프리카 가나의 앤서니 긴공 국민건강보험청 총괄국장의 말이다. 원주 오크밸리 리조트에서 열린 ‘2025년 국민건강보험 국제연수과정’에는 가나·에티오피아·이집트·말레이시아·필리핀·페루·쿠웨이트 등 16개 나라 35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정부 재정을 어느 정도 건보에 지원하느냐” “소득 파악이 안 되는 사람은 어떻게 보험료를 매기냐” 등의 질문을 쏟아냈다.
반도체·자동차처럼 ‘K건보’가 한국의 대표 상품이 됐다. 2004년 이후 22년째 개도국 연수 프로그램이 이어지고 있다. 그간 86개국(일부 중복) 917명이 다녀갔다. 이창연 건강보험공단 국제협력부장은 “‘한국 건보를 배울 기회를 달라’는 요청이 쇄도한다”고 말한다. 버락 오마바 미국 전 대통령이 수차례 한국 건보에 부러움을 표했고, 오바마 케어의 참고가 됐다. 미국은 1920년대부터 도입하려 애썼지만 100년이 지나도 전 국민 건보를 달성하지 못했다.
박정희 “모든 서민이 싼 비용으로…”

한국 건보도 1977년 도입까지 오래 진통을 겪었다. 1948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 시정방침 연설에서 “항상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 향상의 염원이니… 기타 사회보험 제도를 창설 실시하여”라고 말했다. 시행은 하지 못했지만 사회보험을 토지개혁과 같은 선상에 놓을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
50~70년대 한국인의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다. 다음은 61년 5월 22일 자 의사신문(서울시의사회 발간) 사설의 일부.
“서울을 비롯한 어느 도시에나 전염병 환자, 동상·마약·안질 등의 수많은 병객이 거리를 방황하며 구걸하고 간혹 행패를 부린다. 지나가는 신사·숙녀에게 실력 행사하며 덤비니 미덕상 용납하지 못할 일이다. 그 수가 증가해 사회문제에 이르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63년 시정연설에서 “구호선에 그쳤던 복지국가 건설을 강력한 실천력으로 구현…의료보험과 재해보험제도를 발족…”이라고 언급했다. 그해 말 의료보험법이 공포됐다. 다만 원하는 데만 도입하는 임의적 형태였다. 이후 강제 시행을 몇 차례 추진했지만 경제 여건 등을 고려해 계속 미뤘다.
67년 정부 조사에서 병이 나도 49%(농촌은 99%)가 병원에 못 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72년엔 종합병원이 응급환자 진료를 거부하면서 유전무병 무전유병(有錢無病 無錢有病, 돈 있으면 병이 없고, 돈 없으면 병 든다)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북한이 유엔과 세계보건기구(WHO) 총회에서 “남조선은 의료 정책 실패로 많은 인민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심지어 응급환자가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다 사망한다”고 선전했다. 체제 경쟁에서도 밀리는 형편이었다.
신현확 보사부 장관이 의보 강제 시행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박 대통령을 설득했다. 박 대통령이 최종 결심했다. 박정희는 76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모든 서민이 싼 비용으로 의료혜택을 받도록 하기 위한 국민의료제도를 확립, 내년에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80년대에 시행할 예정이던 의보가 77년 7월로 당겨졌고, 500명 이상 대기업을 필두로 닻을 올렸다. 이듬해 회견에서는 박정희는 “사회복지정책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신언항 전 차관은 “63년 이후 의보 전개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88년 농어촌 지역, 89년 도시 지역 의보를 실시해 12년 만에 전 국민 의보 체계를 완성했다. 세계 사회보험 역사에 드문 일이다. 이때 373개 의보 조합이 생겼다. 이후 변신을 거듭했다. 98년 지역조합과 공무원·교직원 의보를 합쳤고(1차 통합), 2000년 7월 여기에 직장의보조합을 통합해 지금의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큰 혼란을 겪었다. 1차 통합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완전 통합은 김대중 대통령이 기여했다. 명칭도 ‘건강보험’으로 바꿨다.
건보 통합으로 재정이 충분하거나 반대로 열악한 조합들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가난한 조합 문제가 사라지자 꾸준히 보험료와 급여를 올려 의료 보장을 확대할 수 있었다”고 평했다(양재진 『복지의 원리』).

반면에 이규식 교수는 보험료 부과체계가 달라서 사회 연대를 훼손했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통합의 전제는 보험료를 걷는 방식이 같아야 하는데, 지역 건보는 소득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소득·재산·자동차(차는 폐지)에도 보험료를 매겼다”고 말한다. 지금도 달라지지 않아 지역 가입자의 불만이 여전하다. 지역 가입자의 건보료 중 30.1%가 재산에서 나온다. 이 교수는 98년 1차 통합 때 진료권을 폐지(환자가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하는 바람에 수도권 집중을 야기했다고 지적한다. 그 전까지 전국을 138개 중진료권으로 나눠 그 안에서만 진료받게 제한했다. 현행 의료의 문제의 하나인 수도권 쏠림이 27년 전에 잉태된 것이다.
이런 한계에도 건보의 성과는 크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1970년 62.3세(세계 119위)에서 2022년 82.7세(16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3위에 올랐다. 2050년 한국이 1위가 될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또 적은 돈으로 큰 효율을 낸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의료비 비율이 8.5%로 OECD 평균(9.1%)보다 낮고, 미국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기대수명이 미국(78.4세)보다 높다.
암 진료비 5%만 환자 본인이 부담

영아사망률도 1970년 출생아 1000명당 49.5명에서 2023년 2.5명(OECD 평균 4.1명)으로 줄었다. 병원도 크게 늘어 인구 1000명당 병상 수가 0.5개에서 14개로 늘었다.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병원·의사 증가율은 인구 증가율보다 훨씬 높았다. 국민의 의료 접근권이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말한다. 길 가다 배가 아프면 5분 안에 전문의를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정 이사장은 “전 국민 건강검진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제도이다. 6대 암 검진도 우수하다”고 말한다. 국민이 너무 의료를 많이 이용하고 병상·고가장비(CT·MRI 등) 등이 너무 많은 걸 걱정하는 판이다. 암·심장병·뇌 질환 등에 걸리면 진료비의 5~10%만 내면 된다. 큰 수술 받았는데 몇백만원밖에 안 내는 걸 보고 다들 놀란다. 헌신적 관료도 K건보에 한몫했다.
문옥륜 전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국민건강보험 40년사』에서 “김종대 전 건보공단 이사장이 보사부 공무원 시절 밤늦게 일하느라 안양천 주변의 자기 집이 폭우에 떠내려가는 것도 몰랐다”고 회고했다.

K건보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3저(저보험료·저급여·저수가)의 한계가 여전하다. 이 교수는 ‘77년 패러다임’이라고 설명한다. 급여(보험 적용) 수준이 진료비의 65% 안팎에서 머문다. 이로 인해 실손보험이 비대해지고 비급여가 커진다. 1-2-3차 의료 이용 체계도 무너진 지 오래다. 의료 행위별로 지급하는 수가 체계도 과잉 진료를 야기한다.
건보 재정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다. 지난해 말 30조원 적립금이 있지만 넉 달 치 지출금에 불과하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2028년 기금 고갈을 경고한다. 정기석 이사장은 “GDP 대비 의료 지출이 아직 OECD보다 낮지만 너무 가파르게 증가하는 게 문제”라고 우려한다. 그는 “수입(보험료와 국고 지원)은 늘리기 힘들다. 부당 급여와 부당 진료, 과잉 진료, 과도한 약제비(27조원), 약의 중복 처방과 남는 약 폐기 등의 지출을 적정하게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다종교 사회’ 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