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첫 아이를 임신 8개월 때 유산했습니다. 그 일을 겪은 후 2014년부터 공처럼 둥근 형태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스택(Stack·'쌓다'는 뜻)' 시리즈를 시작했죠. 보세요, 사실상 이런 구조로 물건이 위로 올라갈 순 없어요. 그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스택'은 제게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지난달 30일 서울 성수동 더페이지갤러리 WEST관에서 기자들과 만난 영국 미술가 애니 모리스(Annie Morris·44)는 자신이 겪은 아픔을 털어놓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돌이키는 게 쉬울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제 작업은 여성이라는 존재에서 비롯된 주제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며 "궁극적으로 제 작업은 트라우마, 고통과 불안을 즐거운 감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조각과 드로잉, 바느질 회화 등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모리스의 한국 첫 개인전이 오는 11월 2일까지 열린다. 규모는 매우 작지만, 작가의 스택 시리즈와 꽃 여인(Flower Women) 시리즈, 그리고 그가 '실 회화(Thread Painting)'라 부르는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인다.
특히 '스택'은 불규칙한 크기의 동그란 구체를 아슬아슬하게 수직으로 쌓은 모양으로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산을 경험하며 둥그렇게 불렀던 체형을 "잃어버린" 그에게 구체는 경이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블루와 초록, 청록색 등 선명한 색채에 위를 향해 올라가는 형태에서 리듬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작가는 구체의 독특한 질감에 자신의 감정을 녹였다.
"잠깐 피었다가 덧없이 지는 꽃에서 아름다움을 본다"는 그는 "만지면 곧 바스러질 것 같은 표면을 통해 그 연약함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독특한 질감을 내기 위해 그는 여러 해에 걸쳐 다양한 실험을 했다. 결국 석고 반죽과 모래, 안료를 층층이 쌓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매우 날 것 같고, 연약하고, 손대면 가루로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을 냈다"고 했다. 그는 이 연작을 가리켜 '안료 조각(Pigment Sculpture)'이라고도 불렀다. 자신이 창안하고 구현한 질감과 색상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한편 꽃 여인 조각은 여성의 몸을 간결하게 선으로 표현한 강철 조각이다. 꽃 형태의 머리와 임신한 여성을 상징하는 신체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어릴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당시 힘들어하던 어머니를 보던 내 감정이 이 작품에 담겨 있다"며 "이 작품은 처음에 어머니의 초상으로 시작됐으나 지금은 나 자신을 표현한 작품이 됐다"고 말했다. 꽃 역시 찰나에 아름답게 피어나고 시든다는 점에서 연약함을 상징한다.
그는 "이번 전시에 나온 제 작품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바로 '연약함(fragility)'"이라고 했다. 하지만 표현은 아이가 한 것처럼 천진하고 자유스러움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슬픔과 기쁨은 아주 가까이 연결돼 있다. 작품을 만들며 내가 절망감과 불안감을 해소한 것처럼, 사람들 역시 내 작품에서 슬픔 대신 기쁨과 즐거움을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날마다 드로잉을 한다. 내 조각 작업도 전부 드로잉에서 시작됐다"고 거듭 강조했다. 드로잉에서 선(線)으로 표현한 것들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표현한 게 조각이 되고, 린넨에 실로 바느질한 회화가 됐다는 것. 그는 이어 "나는 작업을 조각과 회화로 나누지 않는다. 내 작업은 회화의 조각 사이의 경계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모리스는 2001년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엔 에콜 데 보자르, 2003년 런던대 슬레이드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요크셔 조각공원(2021~2022), 상하이 포선 재단 미술관(2024)에서 큰 개인전을 열었으며, 그의 작품은 루이뷔통 재단, 상하이 롱 미술관 마이애미 페레즈 미술관, 서울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