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인 인생에도 이유 있더라…AI는 못 할 선택"

2025-08-26

뇌 과학자 정민환 교수 인터뷰

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뭣 하나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문과 성향인데 학교 맘대로 이과반 보내버리고, 고교 졸업 직후 친구들이랑 그룹사운드 만들어 록스타 될 꿈에 부풀었는데 재능이 따라주지 않았다. 본인은 서울대 갔지만, 대학 못 갈 정도로 공부 못하는 애들과 주로 어울렸다. 형·누나 등 그 시절 대학생들과 달리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대학 내내 업소에서 드럼 치며 푼돈을 벌었다. 그러니 정작 학교에서는 공부에 흥미를 못 느껴 F도 숱하게 받았다. 이렇게 꼬인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뇌 연구자가 됐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출판부에서 영어로 먼저 낸 『기억의 미래』(A Brain for Innovation)를 최근 직접 번역 출간한 한국 1세대 뇌 과학자 정민환(64)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 얘기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시냅스 뇌 질환 연구단 부단장으로 자폐 스펙트럼 장애도 공동 연구하고 있다.

'효자동 백수 클럽' 업소 드러머

F학점 서울대생의 인생 반전기

관심 따르니 헤맨 길도 과정

좋아하는 일 하면 AI보다 낫더라

갈팡질팡, 모순으로 점철된 인생이 이런 반전을 이룬 데는 본인도 잘 모르던 결정적 한 방이 있었다. 바로 '관심'이다. 우연처럼 보이는 모든 경험이 이 관심 속으로 수렴됐다. 어릴 때부터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궁금했으며 재밌었다. 생각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기서 출발한 의문은 왜 동물과 달리 인간만 혁신적 문명을 이뤘는지에 이르렀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뇌 연구에 매달렸다. 좋아하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은 덕업일치의 모범사례다.

딱 하루 치 신문만 훑어봐도 AI(인공지능) 소식이 넘친다. AI가 사기꾼의 조작 정보를 거르지 못한다든지, 인간이 AI에 너무 의존해 정서적 고립에 시달리는 AI 정신병이 대두한다든지, 대학교수나 종교인마저 과거 인간만 할 수 있다고 믿어온 영역을 AI에 내주며 낭패감에 시달린다는 둥 좋든 싫든 AI와의 공존 얘기로 가득하다. 지난 22일 AI 시대에 인간 뇌는 어떤 차별점이 있으며, 또 어떤 능력을 키워야할지 정 교수와 대화했다. 그의 관점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기억의 과거, 효자동 라이언스 클럽 백수

서울대 79학번인데 학교에 적응을 잘 못 했다. 입학 후 박정희 유신 붕괴와 전두환 신군부 등장을 알린 10·26과 12·12가 터졌고, 이듬해는 또 5·18 광주. 이런 정치적 상황 탓도 컸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공부가 안 맞았다.

형·누나 모두 사회학과 갈 정도로 사회과학 쪽에 경도된 유전자를 타고났고 고1 때 적성 검사에서도 완벽한 문과 성향으로 나왔는데, 내 인생과 아무 상관 없는 교감 선생님이 내 인생을 틀었다. "검사 틀렸어, 너 이과야. " 그땐 그런 줄 알았는데, 학교 입시 성과 올리려는 꼼수였다. 적성 안 맞는 이과 전공 중 그나마 자연과학 계열이 의대·공대보다는 나아 골랐다. 문제는 동물학과로 전공 정하기 전 1, 2학년 때 듣는 물리·수학 같은 기초 과목 수업이 너무 재미없었다. 특히 내 문과적 성향과 상극인 화학은 F를 여러 번 맞았다. 시대 분위기도 일조했다. 정치적 불안과 극렬한 학생 운동 등으로 휴교할 때마다 난 딴짓을 했다. 바로 유흥업소 드러머.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술손님 신청곡 연주하는 삼류 악사였다.

교감 선생님 맘대로 내 인생을 좌지우지한 데 이어 가장 친한 친구가 내 인생을 뒤흔든 결과였다. 이번엔 강제가 아닌 자발적 선택이긴 했지만, 친구 따라 집안 유전자와 거리 먼 록 음악 하겠다고 대입 끝나자마자 드럼 학원부터 갔다. 고교 때 나보다 먼저 기타 배운 중학교 절친을 비롯해 같은 동네 살며 젊음을 낭비하던 친구들과 일종의 백수 클럽인 '효자동 라이언스 클럽'을 만들어 놀았다. 꿈만 컸다. 당시 주류인 트로트 대신 제대로 된 록음악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기타 잘 치고 노래 잘하는 숱한 사람들 속에서 내게 음악적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너무 놀아서인지 노는 게 지겹기도 했다. 마침 어릴 때부터 '내가 보는 이 세상이 진짜인가''내 생각의 실체는 무엇인가'라고 품어왔던 인식론적 질문이 다시 자꾸만 떠올랐다. 그렇게 3학년 2학기에 정신 차렸다. 공부는 의외로 재밌었다. 문과였다면 심리학을 했겠지만 동물학과에 왔으니 뇌를 연구하면 되겠다 싶었다. 훗날 서울대 총장과 교육부 장관을 지낸 한국 생물학계 대부 조완규(97·국제백신연구소 고문) 교수 발생학(※세포가 성장해 생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구) 연구실에서 석사까지 쭉 달렸다.

교감과 절친, 이들이 내 의지나 재능과 전혀 다른 길로 날 이끌었지만 결국 어릴 적 관심사로 돌아왔다. AI라면 못했을 선택이다.

기억의 현재, 덕업일치 과학자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 영국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1916~2004) 영향으로 1980년대 생명과학계 화두는 분자 생물학(※생명현상이 DNA·RNA 등 분자 수준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 연구)이었다. 하지만 난 뇌, 특히 '사람이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이 갔다. 우연히 분자 생물학 거두인 크릭이 "앞으로는 발생학이나 (뇌 다루는) 신경과학 연구가 유망할 것"이라고 발언한 걸 보고 확신을 얻어 1986년 미국 UC 어바인으로 유학해 본격적으로 뇌 공부를 했다.

당시 미국은 지금 AI 기틀을 마련한 인공 신경망 연구의 3차 중흥기였던 동시에, 회복된 기억 치료법(RMT)이라는 심리치료 유행이 불러온 '가짜 기억' 논쟁으로 떠들썩했다. 가령 1988년 경찰 폴 잉그램은 두 딸에게 성폭행 혐의로 고소당했다. 그는 처음엔 부인하다 인정한 걸 넘어 아예 '기억'해냈다. 나중에 조작된 기억이라고 알려줘도 믿지 않았다. 이듬해엔 아일린 프랭클린이 20년 전 친구 살해범 자기 아버지 조지라는 걸 기억해 그를 고발했다.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기억 왜곡"을 주장했으나 아무 증거 없이 증언만으로 종신형이 선고됐다. 조지는 6년 만에 풀려났고, 진범도 잡혔다.

기억 왜곡은 물론 아예 '열기구 가짜 사진 실험'을 통해 가짜 기억을 심을 수 있다는 연구가 나온 뒤에도 왜 그런지는 미스터리였다. 그러다 2007년, 우리에겐 이세돌을 누른 알파고 개발사 구글 딥마인드 대표로 익숙한 데미스 허사비스의 연구 등으로 해마가 기억뿐 아니라 상상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동일한 뇌 부위(해마)가 기억과 상상 모두 담당한다는 발견은 위 두 사건 같은 가짜 기억에 대한 중요한 단서였다.

이런 극단적 경우가 아니라도 사람은 컴퓨터처럼 기억을 그대로 출력하는 게 아니라 재구성한다.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뒤섞이거나 사라진 정보를 채우려다 왜곡이 일어나기도 한다. 유학 전 미 문화원에서『피터슨스 가이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UC 어바인에 지원한 일, 우편배달부 실수로 UC 어바인 라벨만 배달돼 광화문우체국으로 찾으러 가며 합격통지서인지 불합격레터인지, 아니면 봉투가 분실됐을까 마음 졸였던 일. 이 기억이 전부 진짜일까. 전엔 사진 한장만 있으면 기억의 진위를 판가름했지만, 생성형 AI 등장 이후 요즘은 오히려 시각물이 가짜 기억을 부추길까 걱정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 덕업일치 연구 인생이 AI 시대의 나침반 역할을 할 거라 믿는다. 엄청난 학습에도 불구하고 AI가 여전히 못 따라오는 인간 신경망의 작동 원리를 이해한다면, 인간이 어떻게 AI와 공존할 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기억의 미래, 퍼스트 무버

박사 과정 시작 무렵부터 해마의 세 핵심 영역 중 덜 알려진 'CA1 신경망' 연구에 천착해왔다. 그 결과 2018년 '해마의 모사(시뮬레이션)-선택 모델'을 제시했다. 해마 기능이 단순한 과거 기억을 넘어, 과거 경험을 기반으로 한 시뮬레이션(모사)을 통해 최적의 미래 전략을 찾는 능동적 과정이라는 이론이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가 쉬거나 자는 동안 해마에선 '기억의 응고화'가 일어나는데, 이 모델을 대입하면 기억은 단순한 경험 강화만이 아니라 자발적인 모사-선택을 거쳐 최적의 전략을 도출하는 과정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가 의식 못 하는 사이에도 뇌는 모사-선택을 반복하며 미래를 대비한다는 얘기다.

학습 능력과 지식 전달 면에서 모두 AI가 인간을 앞서나가면서 인간 고유의 창의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데, 여기서 그 해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

아마 많은 사람이 창의성 하면 고대 그리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순간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맞다. 휴식이 창의성으로 이어지는 3B가 있다. 부피 측정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가 목욕(Bath)하며 긴장 풀 때, 주기율표 만든 멘델레예프처럼 침대(Bed)에 누워 잠을 청할 때,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기차(Bus)에서 롤링이 해리 포터 영감을 떠올린 것처럼, 3B로 뇌를 느슨하게 만들면 기발한 생각이나 문제 해결책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시 AI로 돌아가, 인간은 오랫동안 언어와 창의성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 짓는 차이라고 생각했다. 또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글쓰기나 예술적 창작 등 지적 영역은 대체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젠 아니라는 걸 안다. AI가 이미 여러 분야에서 인간을 능가하면서, AI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가 인간의 주요 능력이 됐다. 그러려면 비판적 사고는 필수다. AI가 주는 정보를 맹신하는 대신 검증하는 능력, 질문을 명확하게 구성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3B를 얘기하면 마치 멍 때리고 쉬는 게 창의성의 전부인 양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모사-선택 모델이 맞다면 상상력은 기억에 기반하므로 결국 개개인이 축적한 지식과 경험이 상상의 질과 방향을 결정한다. 창의력 높이는 비법은 없지만 가치 있는 문제에 꾸준히 몰두하고, 아무리 프롬프트 한 줄로 AI로부터 지식이 쏟아져도 스스로 지식을 축적해야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얘기다.

내 인생처럼 우연 속에서도 관심을 따라가면 '패스트 팔로워'에 급급했던 과거를 넘어 AI 시대에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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