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독립적 추진 체계 갖추고 데이터 기반 정책 수립을

2025-05-22

신정부가 유의해야 할 산업정책의 방향

대선이 눈앞이다. 정치적 격변이 이어지고, 선거기간도 워낙 짧은 탓에 후보들의 공약을 찬찬히 훑어보며 비교, 검증할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오는 6월 3일에 누가 승리하든 달라지지 않는 점이 있다. 글로벌 환경 변화의 파고 속에서 위기를 맞은 한국의 산업을 다시 도약시키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틀과 범위의 산업정책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산업정책의 귀환은 세계적 현상

산업정책은 정부가 특정한 산업이나 부문의 육성을 위해 시장에 개입하는 정책이다. 한때 산업정책은 버려져야 할 구습으로 여겨졌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가 진전되고 세계무역기구(WTO) 자유무역 체제가 정착되자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산업정책이 들어설 여지가 줄어들었다. 산업정책의 유효성에 대한 회의론도 꾸준했는데,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실패와 부작용의 사례가 더 많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국내에서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박정희 시대의 산업정책 과정에서 누적된 모순과 불균형이 위기의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적어도 선진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산업정책이 더 이상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시각이 일반화되었다.

정권 바뀌어도 큰 틀의 정책 변화 없어야 민간 투자도 따라올 것

장기적이고 일관된 전략 수립이 정책 품질 높이고 효과성도 제고

혁신과 성장은 소수의 성공적 기업이 주도 … 창조적 파괴는 필연적

정부-민간 정보교환 체계화하고 선제적 위기대응 시스템 확립해야

하지만 산업정책의 시대가 다시 돌아왔다. 한 빅데이터 연구에 따르면 2009~2020년 발표된 전 세계의 정책 중 4분의 1이 산업정책 조치로 분류된다. 2010년대 후반에 이르면 그 비중이 46%에 육박할 정도로 증가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3년도에만 2500건이 넘는 산업정책이 실행되었다.

산업정책이 귀환한 배경에는 중국의 영향이 크다. WTO 가입 이후에도 노골적인 산업 지원과 개입을 지속한 중국은 제조업 굴기를 넘어 글로벌 산업의 지형을 변화시키고 있다. 유럽연합(EU) 역시 기후변화 대응과 ‘그린 전환’이라는 인류사적 목표를 내세우며 산업정책적 개입을 정당화하였다. 가장 자유주의적이라는 미국마저도 자국 내 산업공동화로 인한 피해의식과 코로나19 이후의 공급망 위기를 겪으며 급기야는 가장 노골적인 산업정책 국가로 변모하였다.

산업정책, 실상은 선진국이 많이 써

사실 산업정책의 역사는 산업화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경제사 연구에 따르면 인프라 구축, 기술혁신 지원, 수출 촉진은 물론 관세정책, 금융지원, 일부 독과점 허용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활용되는 산업정책 수단의 대부분은 19세기 말에도 이미 활발히 사용되었다.

통념과는 달리 산업정책을 많이 사용하는 국가들은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선진국이다. IMF에 따르면 2023년의 전 세계 산업정책 조치 중 선진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71%에 달한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에서는 예산과 행정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 산업정책을 실행하는 것조차 버거운 것이 현실이다.

산업정책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산업정책이 주로 취약한 부문을 육성할 목적으로 쓰인다는 생각이다. 연구에 따르면 산업정책은 수출 집중도가 높고 이미 비교우위가 확보된 산업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승자를 선택하기(picking winners)보다는 이미 승리한 자를 밀어주는(backing winners) 목적이 많다는 것이다.

산업정책의 목표와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과거에는 유망한 산업과 기업을 선택하여 육성하는 정책이 많았던 반면 근래에는 AI 등 첨단 기술의 진흥이나 기후변화 대응, 지역 활성화와 같은 미션을 정하고, 도움이 된다면 누구든 지원하는 ‘수평적’ 정책이 늘었다. 이런 변화는 산업정책이 과거보다 줄어들었다고 여기는 인식의 배경이 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나 반도체법(CHIPS법)에서 보듯이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등 특정 산업을 정하여 지원하는 정책도 다시 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산업정책이 필요한지 아닌지와 같은 논쟁은 무의미하다. 앞으로도 산업정책이 지속될 것임을 인정하고 어떻게 수행할지를 고민하는 편이 생산적일 것이다.

성공적인 산업정책의 특징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해외 연구자들도 주목한 산업정책의 성공 사례다. 최근의 연구 중에는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이 30년 이상 지난 후까지도 한국의 경제와 후생에 긍정적 효과를 미치고 있음을 입증한 사례도 있다. 그렇지만 국가가 주도하여 대기업을 밀어주던 당시의 방식이 유일한 정답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장 우리와 더불어 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린 국가 중에서도 대만은 중소기업 기반 정책, 싱가포르는 외자 유치 중심 정책으로 높은 성과를 일구었다.

연구자들은 산업정책의 성공에는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는지보다 각국이 처한 여건에 맞게 어떤 방식으로 정책을 조합하고 실행하는 역량을 확보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성공 사례들은 국내 산업 보호, 학습효과의 달성, 신기술의 도입, 인프라 구축, 인적자본의 육성 등의 요소들이 갖추어져 유기적으로 결합한 결과이며, 이 중 한두 가지만 부족해도 실패의 확률이 커진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정책적 판단이 가능했는지도 중요하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시장에 개입하면 이해관계자에게 포획되거나 부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박정희 시대에도 정경유착 사건들은 있었다. 그러나 수출실적의 달성이라는 강력하고도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있었기에 문제가 심각해지지 않았다. 반면에 남미의 여러 국가는 국내 산업 보호와 수입대체를 추구했는데, 보호에 안주하려는 이해관계자들로 인해 지나치게 늘어지거나 의미 없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상황의 변화에 따른 유연한 대응능력도 필수적이다. 2000년대 이후 중국경제의 고속 성장기에는 지방정부 간의 성과 경쟁을 유도하는 중앙정부의 전략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단계가 지나자, 이제는 지방정부 간의 경쟁이 부채 누적과 생산성 하락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때 성공을 거둔 정책이라 해도 늘 유효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타성에 젖은 정책의 추진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산업정책은 본질적으로 보호나 평등과 같은 가치와 부딪치기 쉽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혁신과 성장은 소수의 성공적 기업에 의해 주도되며, 근저에는 실패 기업의 퇴출을 포함한 활발한 생태계 순환이 자리하고 있다. 맥킨지 컨설팅에 따르면 미국, 영국, 독일에서 이루어진 생산성 성장 중 3분의 2는 단 2%의 선도적 기업에 의해 달성되었다. 반대로는 1%에 불과한 부실기업이 생산성 하락분의 50~65%를 설명한다. 코로나19 이후에 미국은 선진국 중에도 유일하게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서비스 부문의 원활한 폐업 및 신규 창업을 통한 창조적 파괴가 가능했던 것이 주요 요인의 하나로 지목된다.

산업정책은 실패하기 쉬운 위험한 정책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신정부의 산업정책 추진체계가 갖춰야 할 요소들을 제언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정치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된 정책 추진체계의 수립이 필요하다. 장기적이고 일관된 전략 수립은 정책 품질은 물론 효과성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큰 틀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없으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민간의 투자도 노력도 따라올 것이다.

둘째, 정부와 민간의 정보교환 통로가 체계화되어야 한다. 현장의 생생한 정보와 목소리를 반영하고 상황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려면 민간과의 원활한 의견 교환과 피드백이 상시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셋째, 데이터 기반 정책 수립 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 정책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도 객관적 정보의 수집과 분석은 필수적이다. 최근 여수 지역이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여수의 석유화학 산업이 겪는 어려움을 고려한 적절한 조치지만, 이미 위기가 상당히 현실화한 이후에야 실행된 아쉬움도 있다. 평소에도 지역과 산업현장의 데이터를 수집, 예측하는 조기경보 시스템이 있었다면 진정한 의미의 ‘선제적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다.

신정부가 출범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더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산업정책을 수행해 달라는 요구가 분출할 것이다. 새로운 산업정책의 시대를 맞아 그러한 요구는 어느 정도 정당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업정책은 실패하기 쉬운 위험한 정책이기도 하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지 과욕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냉철하고 주도면밀한 접근을 통해 대한민국 산업 대전환의 역사 만들기를 기대해 본다.

권남훈 산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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