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나라의 흥망성쇠 원인을 알고자 할 때 가장 많이 택하는 연구방법은 부분적으로 비슷한 특징을 가지는 다른 나라들과 묶어 비교연구 하는 것이다. 한국의 고도성장기에 가장 많이 비교 대상이 되었던 나라 혹은 지역들이라면 일본,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이다. 식민지 경험과 수출을 통한 세계시장에의 적극 진입, 정부의 주도적인 역할, 세계가 깜짝 놀랄 지속적인 고도성장 등이 전체적 혹은 부분적 공통점들이다.
한때 선진국들과 비견되던 한국
최근엔 민주주의 퇴행국과 비교
튀르키예와 한국, 닮은꼴 현대사
권력 독주로 민주주의 위험 계속
‘IMF 외환 위기’를 극복한 이후 한국의 비교 대상 목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분단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협치의 모범을 보여준 독일, 공화주의 가치와 사회적 대화의 모델 프랑스, 노사 대타협과 복지국가의 벤치마킹 대상으로서 스웨덴, 유럽 대륙 국가들보다는 시장원리에 치중하되 사회안전망에서는 우리를 능가하는 미국·영국·호주, 우리보다 20년 이상 초고령사회에 빨리 도달했지만 극단적인 갈등을 피하고 비교적 연착륙을 해온 일본 등이 흔히 비교 대상으로 꼽혔다. 경제위기에 처한 그리스나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들은 우리가 따라가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의 사례로 등장했다. 과거 한국과 비교되는 나라들이 주로 고속성장하는 신생국들이었다면 21세기 들어서는 오래된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로 그 대상이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며 학계는 비교 대상 국가들의 목록을 바꾸고 있다. 새롭게 이 목록에 오르는 것은 튀르키예, 헝가리, 브라질, 태국 같은 나라들이다. 안타깝게도 공통점은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경제적으로도 과거의 비교 대상 국가들보다는 한참 뒤처진다. 튀르키예의 사례를 좀 더 자세히 보자. 우리가 때로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하는 튀르키예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 블록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 각각 놓인 두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상 미국의 세계 전략으로부터 비슷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현대 정치사는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한국에 박정희가 있었다면 튀르키예에는 케말 아타투르크가 있었다. 박정희가 한때 ‘국부’로 추앙받았듯이 아타투르크는 ‘투르크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튀르키예의 군부는 1960년, 1971년, 1980년 세 차례에 걸쳐 쿠데타를 일으켰다. 한국의 쿠데타 역사와 연도마저 비슷하다. 다만 튀르키예에서는 2016년에 또다시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가 실패한 것이 한국과 차이였는데, 한국에서 2024년 실패한 쿠데타가 일어남으로써 두 나라의 유사점은 더 늘어나게 됐다. 한때 튀르키예 민주주의의 지도자처럼 보였던 에르도안 대통령은 독재자로 변신하여 11년째 재임 중이고, 내각제 시절 총리까지 합치면 22년간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 특히 2016년 실패한 쿠데타는 에르도안의 폭주를 가져온 방아쇠였다.
그는 실패한 쿠데타의 배후에 거대한 동조세력이 있고 그 정점에는 미국으로 망명한 그의 정적 귈렌이 있다고 주장했다. 쿠데타 세력을 척결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000명이 넘는 장교들, 2500명이 넘는 법조인들, 수천 명의 공무원을 파면하거나 구속했다. 대학에서 자유로운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고 수십 개의 언론사가 청산되어 문을 닫았다. 정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반인들도 귈렌이 벌여온 교육운동이나 사회운동에 조금이라도 동조적인 인상을 보였다면 직장에서 쫓겨나고 여권을 빼앗기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고, 튀르키예에서는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도 접속할 수 없게 되었다. 여당인 정의개발당이 완전히 장악한 의회는 에르도안의 이런 폭주를 견제하기는커녕 전적으로 협조해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에르도안이 한때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처럼 여겨졌다는 점이다. 정치적 이념과 투르크 민족주의,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대립이 복잡하게 얽힌 튀르키예 정치에서 그는 절묘한 줄타기 끝에 집권했고, 일단 집권하자 돌변했다.
한국에서는 군부가 아니라 현직 대통령이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했으니 튀르키예와는 다르다 할 것인가. 무리하고 무지한 쿠데타를 시도한 것은 전 대통령 윤석열이니, 그의 잘못이고 그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31회의 탄핵이 보여주는, 다수 의석을 무기로 한 민주당의 폭주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탄핵 이후 2차, 3차, 4차 내란을 주장하는 것은 튀르키예의 대규모 숙청을 연상케 한다. 자기 당의 대선후보가 다섯 개의 재판에 연루된 마당에 사법부를 겁박하고 대법원장을 탄핵하겠다고 하는 것은 당선 이후 면죄부를 준비하고 충성경쟁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튀르키예에서는 군부와 에르도안이 했던 일을 한국에서는 윤석열과 이재명이 하겠다는 것인가. 국민의힘은 정치적으로 자살했고 민주당은 위험한 일을 벌이고 있다. 한국은 민주주의 퇴행 국가의 비교 목록에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인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