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 아웃] 영화와 숫자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

2024-10-10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숫자로 기록되고 유지되며 몇몇 숫자들은 평생 동안 기억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살아간다. 신생아는 몸무게로 건강을 판정받으면서 자신의 역사가 시작되고 출생신고와 동시에 13자리의 숫자 속에 평생 동안 봉인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열어 본 스마트폰에 표시된 숫자들, 즉 오늘이 며칠 인지 몇 시인지 밤사이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 왔으며 메시지는 몇 개나 왔는지 같은 것을 무시할 순 없다. 다이어트 중인 여성이 씨름하는 체중계 숫자, 은행창구에서 받는 번호표. 로또 당첨 번호, 통장 잔고, 군번 혹은 학번, 신용카드 번호, 인터넷 패스워드들. 게다가 신문을 펼치면 나타나는 오늘의 주식시세와 생필품과 기름 값과 기타 등등. 이렇듯 우리 일상은 숫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숫자란 필요와 목적에 따라 얼마든지 가공이 가능하다. 물론 도덕적으로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때문에 14세기 이탈리아 상공인들과 교황청에서는 ‘0’을 쓰지 않도록 했다. 0은 얼마든지 다른 숫자 뒤에 붙어서 확대 가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0’ 대신에 알파벳으로 cipher라고 썼다.

영화판이 보여주는 숫자에 대한 집착은 거의 병적이다. 누구라도 상영관 숫자와 관객숫자에 매달려 일희일비 한다. 배급 홍보사가 앞장서고 언론이 부추기며 관객의 열화 같은 지원사격이 더해지면 한 편의 영화는 흥행작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획득하게 된다. 감독과 스태프의 노고와 배우의 열연과 빼어난 시나리오가 비집고 들어설 자리는 없다. 오로지 몇 명이 보았느냐 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할 뿐이며 곧 완성도에 대한 평가와 등가를 이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웬만한 상업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1’이라는 숫자를 하나씩 달고 개봉한다. 개봉 첫 주의 순위 확보를 위해 선제공격이 중요하기 때문이다(흥미로운 건 아래 영화들 중에서 중복되는 작품이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10월 개봉작중 사전 예매율 1위 / 10월 둘째 주 개봉작중 가장 기대되는 영화 1위 / 10월 둘째 주 개봉작중 가장 예매하고 싶은 영화 1위 / 10월 개봉작중 가장 기대되는 한국영화 1위 / 10월 개봉작 중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 1위 등등.

이런 순위를 영화 선택의 기초자료로 삼는 관객이 진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이 빤한 숫자가 영화흥행을 견인한다는 점이다. 보통의 관객은 다수가 선택한 줄에 합류하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 거칠게 말해서 마케팅이라고도 할 수 없는 단순한 전략. ‘어떻게든 1위를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일뿐인 광고 카피를 짜내는데 영화의 만듦새가 무슨 영향을 미칠까?

아메리카에 사는 어느 인디언 부족은 숫자를 이렇게 센다고 한다. ‘하나’ ‘둘’ ‘많다’ ‘......’ 이러한 셈법은 아마도 자신에게 꼭 필요한 둘 만 가지면 된다는 뜻일 테다. 숫자를 많이 세면 셀수록 욕심이 커지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요즘 세상에 숫자와 무관하게 살아보자고 주장한다면 현실감각이 떨어지거나 머리가 이상한 사람으로 오인받기 십상이니 적정한 선에서 숫자와 타협하고 살 수밖에 없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숫자와 떨어진 삶도 필요하지 않을까.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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