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세계 산업이 유혈 전쟁 상태다. 국가는 국가들끼리, 산업계는 품목별 기업간에 생존을 건 전투중이다. 예전엔 저마다 국가별로 내세우는 우세 품목과 대표 기업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글로벌시장 판세가 정해지면 그것을 질서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국가간엔 규제와 관세로 싸우고, 기업들끼리는 올오어낫싱(All or Nothing)을 놓고 겨룬다.
우리 반도체나 이차전지가 세계시장에서 겪고 있는 상황이 딱 이렇다. 반도체 1위 자존심을 중국에 내줬다는 우려에서부터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에 관세가 얼마나 물릴지 전전긍긍이다. 세계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했다는 이차전지도 미국 트럼프 신정부의 전기차 우대정책 폐기에 따라 수요 곡선이 어떻게 꺾일지 불안하다. 인공지능(AI), 바이오 등 첨단기술 격전지 곳곳에서 우리가 어렵게 확보한 경쟁력 우위가 위협 받고 있다.
5일 정부가 반도체, 이차전지, AI 등 10대 첨단전략산업 지원을 위해 5년간 50조원 규모의 첨단전략산업기금을 신설, 운영키로 한 것은 시의적절할 조치다. 첨단분야 기술전쟁이 기업 규모나 품목을 가리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대기업부터 중견·중소기업까지 초저리 대출부터 보증까지 '즉시'에 가까운 금융지원을 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반가운 일이다. 아직도 표류중인 반도체특별법 때문에 업계가 입은 상실감이 조금은 덜어질 수 있을 테다.
정부 기금 대부분이 그러하듯, 조성보다는 시간이 훨씬 중요하다. 정부가 기금 조성 및 운용에 관한 산업은행법 개정안과 '첨단전략산업기금채권에 대한 국가보증동의안'을 이달 내 국회에 제출키로 했으니, 국회 또한 조속한 처리 이행이 필수다. 최상목 대통령권한대행 부총리는 이날 기금 계획을 발표하면서 “첨단산업 지원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신설될 이 기금의 산업적 효능을 한마디에 담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연기 자욱한 전쟁터에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땐 자신과 무기를 추스러는 것이 급선무다. 이를 기업에 대입해 보면, 지금처럼 불확실성이 커질 때 기업이 믿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연구와 기술개발이 전부다. 그것도 빠르고 정확하게 압도적인 기술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혼돈 이후 치고나갈 최고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여러 기금이 나왔고, 지금도 존재하지만 이번 첨단전략산업기금만큼은 5년이 아니라 1~2년내 고갈되길 기대한다.
이진호 기자 jho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