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통일을 하려면 DOS/V부터 만들어야 했다[그땐그랬지]

2024-10-08

▲ 소싯적 필자의 피를 들끓게 했던 KOEI의 게임들

<이미지 출처 : aucview.aucfan.com>

젊었을 땐 정말 게임을 위해 산 것 같다. 사양 높기로 유명한 Origin의 게임을 한번 해보겠다고 얼마 되지도 않은 용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PC를 업그레이드했었고 게임 월간지나 PC 잡지를 사 모으며 학교 공부보다 더 열심히 매진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했던 게임은 일본 KOEI의 역사 시뮬레이션 시리즈다. 대항해시대를 하며 사회과 부도를 달달 외웠으며 삼국지를 하며 한문을 익힐 정도였다.

당시 PC의 운영체제는 DOS였다. 지금이야 전 세계 각국 언어들이 화면에 무리 없이 구현되는 것은 물론 실시간 번역까지 되는 시대지만, DOS 환경에서는 각 언어별로 버전이 따로 있을 정도로 장벽이 높았다. 더불어 한글 DOS는 에러가 많다는 소문에 너 나 할 것 없이 영문판 DOS를 설치했을 정도였으니, 다른 언어의 구현은 꿈도 못 꾸는 그런 암흑기라 하겠다. 하지만, 그 암흑기를 극복하려는 게이머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으니 바로 DOS/V다.

▲ DOS/V로 부팅하지 않으면 이 초기화면이 뜬 직후 강제 셧다운된다

‘개인적인’ 발단은 역시 한 게임에서 시작되었다. 때는 1992년 KOEI에서 지금까지도 전설로 회자되는 삼국지3를 출시했다. 저작권 개념이 지금같이 철저한 때가 아니어서 삼국지3는 일본에서 출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 PC 통신에 올라왔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름 게임 소식이 밝았던 필자는 바로 내려받아 실행을 시켰지만, 심금을 울리는 KOEI 로고가 나온 후 첫 화면이 뜨자마자 셧다운 되는 게 아닌가! 강제 셧다운 현상을 처음 겪는 충격과 더불어 그렇게 고사양 게임이 아님에도 실행조차 안되는 상황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여 당시 사용하던 PC 통신 천리안의 모 동호회에 많은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받은 결과 DOS/V라는 존재를 깨닫게 되었다.

▲ DOS/V 환경에서 게임을 설치하는 영상(무려 위저드리 BCF...)

DOS/V는 1990년 즈음 일본의 여러 기업이 일본어 구현을 IBM-PC DOS 환경에서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만든 운영체제다. 당시 일본에서는 NEC에서 개발한 PC-98 시리즈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DOS와 호환이 안되어 골머리를 앓던 중 타개책으로 내놓은 게 DOS/V다. 일단 DOS/V는 일본어 구현을 위한 파일을 여러 개 내려받아야 했다. 현재 Windows 환경에서는 설치 후 부팅하면서 여러 시스템 파일을 자동으로 마운트 되고 램에 상주시킨다. 하지만, DOS에서는 사용자가 일일이 지정해주고 작업이 필요했다.

#config.sys의 설정 예시

#C드라이브의 한글 DOS는 놔두고 A 드라이브 디스켓으로 부팅하는 케이스

DEVICE=A:\HIMEM.SYS

DEVICE= A:\EMM386.EXE RAM HIGHSCAN

DOS=HIGH,UMB

DEVICE=C:\DOS\DOSV.SYS (일본어 디스플레이 드라이버)

DEVICE=C:\DOS\JFONT.SYS (일본어 폰트 파일)

DEVICE=C:\DOS\KEYB.SYS (일본어 키보드 드라이버)

8 FILES=30

BUFFERS=20

우선 필요한 파일은 일본어 디스플레이 드라이버는 DOSV.SYS($disp.sys)와 일본어 폰트 파일인 JFONT.SYS($font.sys)였다. 그리고 필수는 아니었지만, 신장수 등록을 위한 일본어 키보드 드라이버 KEYB.SYS도 내려받았었다. 파일이 준비되었다면 CONFIG.SYS를 수정해야 했다.

#AUTOEXEC.BAT 설정 예시

@ECHO OFF

A:\MSCDEX.EXE /D:MSCD001 (CD롬 드라이브가 있을 경우)

A:\KEYB JP,,C:\DOS\KEYBOARD.SYS (키보드 레이아웃을 일본어로 변경)

SET LANG=JAPAN

SET TEMP=A:\TEMP

SET TMP=A:\TEMP

PROMPT $P$G

물론 KOEI의 고급스러운 사운드까지 사블이나 애드립을 통해 듣고 싶으면 드라이버를 추가로 로드하고 IRQ까지 설정해 줘야 했다. 그리고 DOSKEY나 PATH 같은 명령어는 AUTOEXEC.BAT에서 자동 실행해 주는 게 편리했다. AUTOEXEC를 안 돌리면 일일이 명령어와 옵션을 입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 이미지는 DOS/V로 부팅해 A 드라이브의 파일 내역을 DIR 명령어로 불러온 화면이다. 물론 실제 DOS 화면은 아니고 애뮬레이터로 돌린 상황이다. 일본어 폰트 파일이 여러 개 인 것으로 보면 꽤 버전업이 된 DOS/V인 것 같다. 한글 DOS도 영문 DOS도 아닌 이상한 기분이 들었고 폰트도 낯설어 처음 사용할 때 무척 긴장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 게임이 설치된 경로로 들어가 KOEI.COM을 실행하면! 일본어로 표시되는 명작 게임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삼국지3 초기 화면의 음악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 Elf 사의 동급생 1편의 등장인물들 19금이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DOS/V로 부팅하는 목적은 삼국지3이나 대항해시대 같은 KOEI 게임만이 아니었다. 19금 게임인 동급생 시리즈도 일본어 표기를 위해 DOS/V로 부팅했었다. 게임 장르상 일본어 대사와 선택지가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무난한 게임 진행(?)을 위해선 일본어 표기가 필수였다. 자세한 추억은 생략하겠다.

가이낙스의 히트작 프린세스 메이커 1편도 빼놓을 수 없다. 삼국지3보다 1년 빠른 1991년에 출시된 게임이기 때문에 오히려 DOS/V를 더 일찍 만들게 되는 원조아닌 원조라는 의견도 많다. 대만의 만트라가 라이선스를 취득하여 정식 한글판이 1년만에 나와버려서 DOS/V의 파워는 이내 삼국지3으로 이어졌다.

지금 시각에서는 DOS/V는 불법적인 행위를 방조, 혹은 동조하는 수단으로 쓰인 운영체제다. 일본어 표기라는 궁극적인 목표로 사용되곤 했지만, 결국 정품 게임을 무단으로 복제해 실행시키는 열쇠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결국 외국 게임의 정식 한글화 버전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한국 게임 시장의 저변을 확대하는 순효과도 가져왔다. 과거는 과거일뿐이니 여기까지의 회상에서 마무리하겠다만, 그 시절 게임이라는 목표를 위해 밤새 공부하고 노력했던 젊은 나 자신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미련인가 보다.

기획, 편집, 글 / 다나와 정도일 doil@cowave.kr

(c) 비교하고 잘 사는, 다나와 www.danawa.com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