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핵심 업무인 독과점 남용 사건을 조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5년에 육박하고 있다. 조사가 장기화하면 대상 기업이나 독과점 피해를 주장하는 기업 모두 속이 탈 수밖에 없다.
21일 정부와 영국의 정책 전문지 ‘글로벌 경쟁 리뷰(GCR)’ 등에 따르면 지난해 공정위의 '시장 독과점 남용' 유형에 대한 평균 조사 기간은 56개월(4년8개월)에 달했다. 세계 17개국 가운데 3번째로 길다. 조사 기간이 가장 짧은 뉴질랜드(8.7개월)나 대만(9개월)의 6배를 넘는다. 유럽연합(EU·19개월)에 비해서는 3배에 육박한다.
공정위는 문제 해결을 위해 지난해 4월 정책 기능과 조사 기능을 분리하는 조직개편을 했다. 그 결과 조사 기간이 다소 감소했다. ▶독과점 남용 ▶담합 ▶불공정 거래 행위 등을 포함한 '전체 사건'의 평균 처리(의결사건의 경우 착수일부터 의결처리합의일까지) 기간은 2022년 221일에서 지난해 172일로 22%가량 줄었다. 그러나 국회 정무위원회의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이 확보한 공정위 자료에 따르면 올해 들어 9월까지는 평균 처리 기간이 198일로 전년(172일)보다 15% 넘게 늘었다.
공정위의 조사 기간이 길어지면 일단 조사 대상 기업을 둘러싸고 불확실성이 커져 경영 활동에 차질을 빚게 마련이다. 공정위는 2021년 9월부터 지난달까지 3년여 동안 택시 중개 플랫폼 카카오T의 운영사 카카오모빌리티를 조사했다. 시장지배적·거래상지위 남용 행위가 의심된다면서다. 당시 카카오모빌리티 내부에선 위법 여부를 떠나 “장기간 조사에 신경 쓰다 본래 업무에 방해될 뿐만 아니라 투자 등 의사 결정이 지연되고 기업 평판이 손상돼, 우버 같은 해외 플랫폼과의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이후 공정위는 위법 행위를 짚어내는 데 성공하긴 했다. 72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법인을 검찰에 고발하면서다. 그러나 조사가 길어지며 카카오T의 시장점유율은 14%(2019년)에서 79%(2022년)로 뛰었고, 경쟁 플랫폼들(우티·타다·반반택시·마카롱택시)은 시장을 완전히 떠나거나 사실상 명맥만 겨우 이어가게 됐다.
최근 자영업자들의 배달 플랫폼 중개 수수료 부담 논란도 공정위의 조사 장기화 탓이라는 분석(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이 나온다. 안 교수는 “사실상 주요 배달 플랫폼들(배달의민족·쿠팡이츠)이 독과점 지위를 악용해 폭리를 취하면서 자영업자들이 한계 상황에 몰린 모양새인데, 공정위가 초기에 신속하게 조사하고 제재했다면 일이 지금처럼 커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사 장기화의 원인으로 한기정 공정위원장은 지난달 21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인력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실제로 다른 주요 국가(미국·일본·EU)의 경쟁당국에 비해 공정위 인력은 20~50% 수준에 그친다. 인력 대비 처리해야 하는 사건 수도 많다. 기업결합 심사 업무의 경우 지난해 공정위의 1인당 심사 건수는 74건인 반면, 일본은 5.2건, 미국은 10.5건(2020년)에 그쳤다.
더욱이 공정위는 해외 국가의 경쟁당국보다 업무 범위가 확연히 넓다. 조성익 한국개발연구원(KDI) 산업시장정책연구부장은 “공정위는 해외 경쟁당국과 같은 일(반독점 조사 등)을 하면서 갑을 관계를 다루는 공정당국 일도, 소비자 보호를 하는 소비자당국 일도 해야 한다”며 “이렇게 경쟁당국이 여러 업무를 맡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지적했다.
공정위의 업무 부담을 키우는 요소는 또 있다. 이호영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주요 해외 국가의 경쟁당국은 접수하는 사건을 다 처리하지 않고 중요성 등을 고려해 선별 처리하지만, 공정위는 모든 사건을 빠짐없이 조사해 마무리 지어야 하는 부담이 크다”고 설명했다. 대안으로 정태원(사법연수원 33기) 변호사는 “공정위의 인력을 늘리면서 전문성도 키워야 한다”며 “또한 업무 범위를 줄이는 등의 제도 개선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시범적으로 운영중인 공정위 중점조사팀을 검찰의 특별수사부나 국세청의 조사4국처럼 활성화해 주요 사건부터 조사 기간을 단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