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게임 이론으로 보면 꽝이에요.”
미국 사정에 밝은 전직 장관 A씨가 이런 진단을 내놨다. 한·미 양국 정부는 지난해 10월 방위비 협상을 조기 타결했다. 미 대선을 한 달 앞둔 시점, 협상 5개월여 만의 속전속결이었다. 2026~2030년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이 합의됐다. 2026년 분담금은 전년보다 8.3% 증가한 1조5192억원. 주한미군 운영이 양국 정치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속내는 동맹에 방위비 증액을 과도하게 압박하는 트럼프의 재집권에 대비해 서두른 것이기도 했다. A씨의 분석은 이랬다. “해리스 부통령(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이 당선되면 방위비 협정을 빨리 매듭짓든, 늦게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어떤 경우든 바이든 정부 정책을 계승할 테니까. 그러나 협상을 미리 끝냈는데 트럼프가 당선되는 경우를 가정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이 민주당 정부와 손잡고, 그것도 서둘러 협상을 마쳤다는 자체가 트럼프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트럼프 정부가 그 협정을 지킨다는 보장도 없는데. 따져보면 미국 대선 전에 협상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방위비 조기 타결, 과연 득이 될까
중국, 트럼프 1기보다 경쟁력 세져
세계시장서 한·중 격돌 거세질 듯
실제로 트럼프는 그로부터 10여 일 뒤 한국을 ‘머니 머신(현금 지급기)’이라 부르며 자신이 대통령이라면 한국이 주한미군 주둔 비용으로 연간 100억 달러(약 14조3450억원)를 낼 거라고 주장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A씨 지적엔 수긍할 점이 있다. 우리 정부는 미 대선 판세 파악도 하지 못했지만 게임에 대한 이해도 빈약했던 것이다.
트럼프 2기가 출범했다. 돌아온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기존 질서를 뒤집어놓을 거라는 ‘트럼프 포비아’가 대세지만, 트럼프 2기가 한국 경제에 기회가 될 거라는 기대감도 적지 않다. 트럼프 1기 때는 그랬다. 미국의 대중 제재로 반사이익을 봤다. 한창 성장하던 중국 IT업계는 미국 제재에 기세가 꺾였다. 덕분에 우리 반도체와 전기차는 시간을 벌었다. 반면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별로 훼손되지 않았고, 양국 협력이 강화되면서 쪼그라드는 대중 수출의 빈자리를 미국 시장이 대체했다. 이번에도 트럼프가 콕 집어 손을 벌린 조선업, 미국 내 산업 기반이 와해된 원자력 등 협력할 분야가 적지 않다. 미국의 동맹 중 한국만 한 제조업 기반을 갖춘 곳도 없다.
그러나 과잉 기대는 금물이다. 트럼프 1기와 상황이 확연히 달라졌다. 트럼프의 관세폭탄이 촉발할 미·중 관세 전쟁의 불똥은 우리 기업으로 튀게 돼 있다. 한국의 대중 수출 약 80%가 중간재다. 한국은행은 트럼프의 공언대로 중국에 관세 60%(다른 나라엔 10%)가 부과되면 한국의 대중 수출이 6% 이상 하락할 것으로 전망한다.
관세 전쟁도 문제지만, 진짜 위기 요소는 한·중 기업 간 격돌이라고 본다. 중국은 트럼프 1기 때의 중국이 아니다. 첨단산업 육성과 시장 다변화, 그 어려운 두 가지를 해냈다. 전기차와 배터리는 세계 공급망을 장악하고 가성비와 기술력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다. 반도체 역시 미국의 첨단 칩·장비 수출 통제 속에서도 한국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미국 제재의 타깃이 됐던 SMIC는 세계 3위 파운드리 업체로 성장했다. 중국은 미국 외 시장도 적극 개척했다. 대미 수출 비중은 줄고(2000년 21%→2024년 10월 누계 15%), 아세안과의 무역 비중이 확 늘었다(2004년 9.2%→2023년 15.4%). 트럼프 1기로부터 8년이 중국엔 ‘잃어버린 8년’이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이 시장 장벽을 높이면 중국은 아세안과 중남미 시장 공략에 더 열을 올릴 것이다. 그럴수록 한국 기업과의 격전이 불가피해진다. 그러니 미국의 중국 견제가 한국 경제의 이익으로 직결되리란 기대는 환상에 그칠지 모른다.
탄핵 정국 속, 우리는 트럼프가 가져올 충격에 얼마나 준비돼 있는가. 준비 없이도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정신 승리는 독이 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