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베 추락하면 어쩝니까”…‘몸무게 6톤’ 부처님의 이사

2024-07-02

“경천사 탑을 세우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좋은 돌을 선별해서 잘 깎은 건 물론이고요, 이게 대리석이지 않습니까. 돌에는 결이 있고 대리석은 퇴적암이라 그게 더 심한데, 결이 어긋나면 나중에 균열이 생길 수 있거든요. 그것까지 면밀히 고려해서 부재(部材, 건축 구조물의 요소)를 맞춘 흔적이 보이더라고요. 탑의 기단과 기단도 2~3㎝ 되는 홈을 통해 서로 딱 맞게끔 해뒀고요. 700년 전에 이렇게까지 했구나 감탄하면서 올렸지요.”

(이용희 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장)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경천사지 십층석탑(국보)을 처음 만나면 일단은 규모(높이 13.5m)에 놀라고 다음엔 정교하면서 복잡한 구성에 놀란다. 탑의 맨 아래인 기단부(1~3층)와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석 1~3층까지는 한자의 아(亞)자 같은 형태로 사면이 돌출돼 있다. 정확히는 아(亞)자가 포개진 형태로 각 층이 20각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석가탑 같은 반듯한 방형(사각형)에서 크게 달라진 형태다. 여기에 탑신석 3개 층은 목조건축을 연상시키는 지붕과 공포(栱包, 처마 끝 무게를 받치기 위해 댄 나무쪽)까지 정밀한 게 섬세한 공예품을 보는 듯하다.

게다가 각 면의 도상은 얼마나 다채로운가. 물론 맨눈으로 분간하기엔 훼손이 너무 심해서 ‘애초엔 다채로운 도상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다. 석탑을 만들 때만 해도 또렷했을 인물 표정과 몸짓들은 세월의 풍화 속에 깎여 나가고 떨어졌다.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과 함께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대리석 탑이다. 화강암에 비해 무르고 표면이 고와서 조각으로 멋 부리기가 쉬운 편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상하기도 쉽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이전 당시 이 연약하고도 섬세한 돌을 어떻게 다뤄 쌓아 올릴 것인가가 마지막까지 관계자들 피를 말리게 했다.

‘용산의 고민’은 그뿐 아니었다. 혹시 박물관 3층 불교조각실에 가보신 적 있는가. 들어서자마자 입을 딱 벌어지게 하는 대형 철불과 석불들이 있다. 무게가 수 톤에 이르는 이 불상들이 여기까지 오는 과정 역시 구구절절 사연이 많다.

그런데 2005년 ‘포장 이사’ 당시 실무자를 끙끙 앓게 한 ‘최대 골칫거리’는 보신각 옛 종이었다고 한다. ‘보신각종이 여기서 왜 나와?’ 하겠지만, 매년 타종행사로 새해를 알려오다 노후화로 인해 1985년을 끝으로 새 종으로 교체됐다. 신라 경덕대왕 신종(에밀레종)을 본떠 새로 주조한 게 지금의 보신각종이다. 그러면서 옛 종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서 현재 박물관 야외 뜰에 전시돼 있다.

이번 회차는 이렇게 ‘용산에 온 거대 유물들’ 모음이다. 먼저 경천사 탑 쌓는 과정부터 돌아보고 나머지도 둘러본다. 어딘들 사연 없는 박물관이 없겠지만 우리나라 최고·최대 유물이 모인 국립중앙박물관이니 켜켜이 쌓인 뒷얘기가 수북하다.(※이 기사는 〈개성 석탑이 왜 용산에 왔나…일제 ‘보쌈’ 뒤 100년 수난기〉에서 이어집니다.)

개성 쪽에 있는 옥탑을 일본인들이 약탈해간 사건은 이미 거론하였지만 그곳에서 방금 또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풍덕군 서면 경천리 읍내에서 10여 리 되는 곳에 있었던 그 탑은 고려 공민왕 때에 중국 원나라의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왕비로 시집오면서 석탑재(材)를 가지고 와서 세웠던 것이다. 서울의 사동탑(원각사지 십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중국 원나라 재상 탈탈의 원탑이다. 그 돌은 옥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며 돌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여 사동탑과 똑같다. 탑의 아래층에 조각된 인물상들은 무지한 부녀자들이 쪼아가 상처를 입었고, 위층의 인물상들은 온전하니 이는 600여 년이나 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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