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2월, 프라다는 단순한 캠페인을 넘어선 문학적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작가 오테사 모시페그와 배우 캐리 멀리건이 함께한 이 프로젝트에서 공개된 책 『Ten Protagonists(열 명의 주인공)』는 단지 종이의 묶음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럭셔리였습니다. 이 캠페인 책자는 패션 사진가 스티븐 마이젤의 작업과 연계된 프라다의 신상품 캠페인으로, 모시페그가 멀리건이 연기한 10명의 캐릭터 각각을 위해 1인칭 단편을 써서 구성한 작품입니다. 패션 캠페인이 하나의 문학작품이 된 셈으로, 프라다는 단순히 예쁜 옷을 만드는 데서 나아가 ‘생각하는 브랜드’가 되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소비의 자극보다 의미 추구
감성 변화 맞춘 브랜드의 변신
가장 가벼운 사치는 읽는 것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던 시대를 지나 풍요로운 삶으로 진입하면서, ‘필요’에서 ‘취향’으로 소비의 무게중심이 이동했습니다. 실용에서 출발한 상품이 점차 기호품이나 사치품으로 격상되는 과정에서, 브랜드가 제공하는 가치는 단순한 제품을 넘어 문화와 감성까지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패션 산업은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해 온 분야입니다. 화려한 색상의 소재, 정교한 패턴의 원단, 미려한 디자인의 제품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습니다. 이러한 패션의 전장에서 최근 조용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럭셔리라 불리는 화려한 명품의 세계가 ‘입는 것’을 넘어 ‘읽는 것’으로 서서히 확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옷과 가방을 판매하던 럭셔리 업계에서 “읽는 것이 새로운 럭셔리”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고, 실제로 여러 브랜드가 ‘읽는 소비자’를 의식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브랜드는 종종 무거운 의미를 가벼운 형태로 전달해야 합니다. 프라다는 그것을 세련된 단편소설로 표현했다면, 발렌티노는 우아한 손글씨로 응답했습니다.
발렌티노는 뉴욕의 인디 출판사 드림 베이비 프레스와 협업하여,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한 ‘Personalized Love Letters(개인화된 사랑 편지)’ 프로젝트를 선보였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6명의 현대 작가들이 열정과 위트를 담아 쓴 사랑의 편지들을 공개했고, 주요 발렌티노 매장에서 방문객들이 원하는 편지를 골라 특별한 편지지에 손글씨로 받아볼 수 있게 했습니다. 발렌티노는 사랑을 보여주는 대신 사랑을 쓰는 법을 디자인한 것입니다.
명품 브랜드들은 과거처럼 로고가 큰 상품이나 화려한 패션쇼가 아니라, 옷보다 문장을 입히고, 런웨이보다 손글씨에 감정을 싣는 방식을 통해 소비자와 교감하고 있습니다.
짧게 소비되는 수십초짜리 쇼츠 영상 수백 개가 하루를 채우는 시대입니다. 순간적인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콘텐트의 홍수는 무언가 잔뜩 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허무함을 남기곤 합니다. 이러한 피로감 속에서 읽는 것이 주는 깊이 있는 즐거움은 이제 최고의 럭셔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리테일 공간도 반응하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후 오프라인 매장은 더 이상 물건만 파는 곳이 아니라 머무르는 공간, 즉 브랜드가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과 문화를 체험하는 무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구찌는 매장 안에 갤러리를 열었고, 아크네 스튜디오는 도서관처럼 매장을 꾸몄습니다. 폴 스미스는 손님이 고르는 책 사이로 옷을 놓았고, 마르지엘라는 카페와 서점을 나란히 배치했습니다. 이제 매장은 문구점-책방-갤러리-카페가 연결된 감성 복합체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2024년 이솝은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퀴어 도서관’ 행사를 열었습니다. 제품이 있던 자리에 책이 진열되고, 구매보다 독서를 권했습니다. 성소수자 작가들의 책이 원하는 방문자들에게 무료로 배포되었고, 향기 대신 문장이 소비되며 브랜드는 공간을 점유하기보다 의미를 전달했습니다. 브랜드는 이제 잠재 구매자에게 스스로의 존재를 알리는 홍보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세상에 전달하고 싶은 진심을 담은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2025년 서울에서 ‘인벤타리오’라는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습니다. 취향 셀렉트숍 29CM와 문구 편집숍 포인트오브뷰가 함께 만든 이 행사는 문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로, 올해 처음 열렸음에도 많은 이들에게 환영받았습니다. 읽고 쓰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자신만의 작업을 위한 문구를 고르기 위해 전시장을 빼곡히 채웠습니다. 자판으로도, 음성으로도 문자를 입력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차분히 펜을 쥐고 종이의 여백을 메우던 작가의 마음을 느끼고 싶은 이들이 늘어만 갑니다. 이렇듯 글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매력으로 다시금 다가오고 있습니다.
프라다는 글을 쓰는 브랜드가 되었고, 발렌티노는 사랑을 손편지로 써주는 브랜드가 되었으며, 이솝은 매장을 도서관 책장으로 채운 브랜드로 거듭났습니다.
지금, 가장 무거운 것은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문장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벼운 사치는 바로 ‘읽는 것’입니다.
송길영 Mind M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