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다시 피어나려는 마음만큼은 분명히 있어요.”
밴드 루시가 데뷔 5주년을 맞아 더블 타이틀곡 ‘잠깨’와 ‘하마’를 담은 6번째 EP ‘와장창’으로 돌아왔다. 신광일의 입대 후 처음 발매하는 앨범인 만큼 변화는 필연적이었다. 공백기에도 멈추지 않았던 세 멤버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감각과 감정을 다듬었고, 그렇게 만든 이번 앨범에는 루시 특유의 ‘희망의 감성’이 더욱 또렷하게 새겨졌다.
앨범 타이틀 ‘와장창’에서 알 수 있듯이 루시는 이번에도 자신이 안고 있던 것들을 ‘와장창’ 깨뜨리며 돌아왔다. 본인들을 ‘민들레 같은 밴드’라고 표현한 조원상의 말은, 루시가 음악 안에서 어떤 태도를 유지하고 싶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들어도 다시 퍼지고, 흩어져도 결국 다시 피어난다는 뜻이다.
“우리는 수수한 꽃이에요. 하지만 시들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씨가 날아가서 다시 꽃이 되는 민들레 같다고 생각해요.”(조원상)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갤러리카페 더스페이스에서는 밴드 루시의 6번째 EP ‘와장창’ 발매 기념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그룹 루시의 프로듀서이자 베이시스트 조원상은 루시가 추구하는 방향성에 대해 ‘입문용 밴드’라고 설명했다. 다만 여기서의 ‘입문’은 출발점이지 도착점은 아니다.

“저희는 입문하기 쉬운 밴드이고 싶어요. 옆집 형 같고, 베테랑 같은 느낌이 동시에 있는. 그렇지만 입문만 하고 거쳐가면 섭섭하죠. 밴드 음악 안에서도 락, 발라드, 재즈처럼 다양한 장르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 안에서 더 깊이 있게 보여줄 수 있는 팀이 되고 싶어요.”(조원상)
그러한 방향성 속에서 루시는 계속해서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앨범의 더블 타이틀곡은 그런 실험의 연장선이다. 기존과 새로운 색을 모두 지닌 곡들이다. 그 중심엔 늘 수록곡이 가려졌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번엔 하마로 욕심을 부려봤어요. 대중성을 얻는 과정에서의 실험인 것이죠. 대중성이라는 것을 파악하려면 극단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실험을 했으니 다음 번에는 어떻게 하면 이를 잘 중화시켜야할지 고민해야 겠네요.”(조원상)
‘하마’는 제작 방식부터 자유로웠다. 말 그대로 ‘말’이 먼저였고, 그 뒤를 음악이 따랐다. 아무 말이나 멜로디로 녹음한 다음 가사를 입히는 식. ‘힙포’라는 단어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하마’가 됐고,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확장했다.
더블 타이틀이지만 수록곡에 대한 멤버들의 애정은 남달랐다. 매 곡마다 타이틀 곡 급의 퀄리티를 뽑아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멤버들은 말한다. 심지어는 “타이틀 자리가 부족해 수록곡이 됐다”라고 말했을 정도. 그중 최상엽 픽은 ‘블루’와 ‘미워하지 않아도 될 수많은 이유’다.
“블루라는 단어엔 우울이란 감정이 담겨 있잖아요. 하지만 ‘블루’는 그 우울함을 와장창 깨보자는 의미를 담았어요. 또 ‘미워하지 않아도 될 수많은 이유’는 팬 분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쉽게 들어볼 수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죠.”(최상엽)

신광일의 입대 이후 첫 앨범은 기존과는 또 다른 구성이 필요했다. 보컬과 작곡 비중에도 변화가 생겼다.
“광일이 없이 만든 첫 앨범이었어요. 작곡에도 많이 참여하던 멤버다 보니 보컬 중심이 상엽이 형에게 맞춰졌고요. 그래서 더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지만, 동시에 상엽이 목소리 하나로 다채로움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죠.”(조원상)
그런 고민은 공연에서도 이어졌다. 라이브 무대에서 루시는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그 연장선에서 최근 진행한 첫 버스킹은 새로운 자극이 됐다.
“원래 버스킹 좋아하는데, 이번이 첫 루시 버스킹이었어요. 예상보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셔서 놀랐고, 끝나고 나서도 원상이랑 얘기 많이 했어요. 자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신예찬)
공연은 늘 반복되지만, 루시는 반복되지 않는 구성을 추구한다. 관객마다 다른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즉 루시 콘서트에 처음 오는 사람도 있고, 매번 오는 사람도 있어서 이들 모두를 만족하도록 셋리스트 구성이나 편곡을 달리 하는 것이다.
“저희는 공연 때마다 ‘이번에도 채워질까?’ 하는 불안이 항상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늘 비슷한 구성의 밴드는 아니고, 새로운 셋리스트로 색다른 모습 보여드리려고 해요.”(신예찬)

결국 루시의 동력은 팬이다. 지치더라도, 누군가 기다려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된다.
“힘들지만, 안 해서 힘든 것보다는 나아요. 기다려주는 분들이 있잖아요. 내가 열심히 하면 그분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고, 그분들은 이미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으니까요. 안 할 이유가 없죠.”(조원상)
루시는 다시 한 번 피어날 준비를 마쳤다. 그들만의 무기는 확실하다. 바이올린이라는 독특한 악기 구성이 루시의 사운드에 개성을 더하고, 최상엽 특유의 감정선 깊은 보컬이 그 중심을 잡는다. 단순히 ‘악기 많은 밴드’가 아니라, 어떤 무대든 재구성해내는 편곡력과 감정선이 있다.
“저희는 사람들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진짜 잘할 수 있는 걸 놓치고 싶진 않아요.”(조원상)
음악을 ‘와장창’ 깨부순 뒤 남은 자리에서 루시는 다시 자신만의 자리로 돌아온다. 민들레처럼, 언제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와장창’ 깨지고 난 자리에 새로 피어난 민들레처럼, 언제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