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서진문, 경성에서 울산으로…가족과 짧은 재회, 울산 사회단체간담회 참석

2024-07-06

서진문이 1927년 10월 말 경성을 떠나 울산으로 향했을 때 함께 귀국했던 재일조선노총 대표들과 가나가와조선노조 이동재는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조선공산당 사건 공판을 방청하고 돌아온 조선노조 대표단은 일본 각지 사회단체와 연계해 ‘진상 순회 보고’를 진행했다.

재일조선노총은 보고를 청취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제 경찰의 고문 수사의 진상을 밝히고 비밀재판에 반대하는 ‘삐라’(선전물)를 대량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10월 30일 오후 1시 오사카 조선노조 집행위원회는 선전물 제작을 첫 번째 결의사항으로 채택하고 실행은 집행부에 일임했다.

서진문이 고향 울산으로 향하는 길

서진문은 재일노총 회의가 열리던 10월 30일, 방어진 혁노회관에서 개최한 울산사회단체연합 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간담회는 서진문이 고국에서 자신의 이름과 직위를 공식으로 드러내고 참가한 첫 행사였다. 서진문은 약 3년 동안 재일조선인 노동자들과 온몸을 부대끼며 항일 혁명운동에 매진했기 때문에 울산에 올 기회가 없었다. 서진문은 요코하마와 가나가와현 일대를 누비면서 활동했고,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며 노동조합 대회에 참가한 숨 가쁜 일정을 따져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딸 정자는 회고록에서 시기는 적지 않은 채 모두 6차례 도일했다고 밝혀놓았고 그때마다 밀항선을 타고 도항했다고 말한다.

당시 요코하마에서 울산 동면을 오가는 길은 기차와 선박 등 교통편을 여러 차례 갈아타야 했으며 시간도 며칠이 걸렸다. 대한해협을 건널 때는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서진문이 조선공산당 공판 참관인으로 경성에 파견될 때는 사전에 언론 기사로 몇 차례 보도된 만큼 정식절차를 밟아 진행된 것이었다. 공식 귀국 일정을 짤 때부터 고향 울산을 경유하는 여정을 서진문이 포함됐던 재일단체 대표단은 경성에 도착한 직후부터 일제 경찰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국내 활동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실제로 후세 다쓰지와 동행해 2차 대표단으로 경성에 도착했던 재일조선노총 소속 박균은 10월 30일 고향 곽산으로 향했다 체포됐다. 박균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열린 관서 민중대회에 참가한 후 기차를 타고 곽산으로 가던 도중 정주역에서 검속당했다.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치됐다가 18일 만에 풀려났다.

서진문이 참가한 울산지역 8개 단체 연합간담회

서진문이 울산에 도착한 후 참관한 울산 사회단체 연합간담회는 8개 단체 대표자 17명이 참석했다. 참가단체는 동면의 오월청년동맹을 비롯해 울산읍, 병영, 범서, 대현, 웅촌, 온양, 언양 청년회였다. 간담회 주최단체였던 오월청년동맹은 기존 동면청년회(동면구락부)가 이름을 바꾼 것이다.

연합간담회는 여름부터 세 차례 이상 개최가 연기된 상황에서 열렸다. 일제 경찰이 노골적으로 대회 개최를 방해하고 간섭했기 때문이다. 개최가 성사된 날에도 정복과 사복을 입은 경관들이 행사장 안까지 들어와서 참가자들을 감시하며 압박했다.

박학규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임시집행부를 선출했다. 동면 성세빈, 병영 강철, 언양 신영업 등 세 명이 공동의장을 맡았다. 연합간담회의 첫 결의 사항은 울산청년연맹과 울산군청년연맹으로 양분돼 몇 차례 충돌했던 울산지역 청년단체를 하나로 규합해 울산청년동맹을 만드는 것이었다. 참가한 청년단체들은 12월 13일 개최한 울산청년동맹 발기회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두 번째 결의사항은 간담회를 개최한 핵심 목표였던 ‘신간회 울산지회’ 설치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세 번째 결의는 언양 일본인 가리야가 조선인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진상 보고와 성토였다.

그중 ‘신간회 울산지회’는 당시 전국적인 항일전선의 흐름과 울산을 연결시키기 위해 시급히 조직해야 할 과제였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저녁,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 대강당에서 창립했고 ‘민족유일당’을 기치로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 민족주의 세력이 하나로 모인 단체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최대 4만 명)의 항일운동 단체였다.

사회주의 계열이 신간회 결성에 적극 나선 배경은 1926년 3월 열린 코민테른(국제당) 5차 대회에서 가결된 ‘3월 결정서’에 따른 것이다. ‘3월 결정서’는 그동안 보류했던 조선공산당의 국제당 지부 승인을 결정하면서 당면과제로 ‘민족혁명 통일전선’을 명시했다. ‘조선공산당과 당 외 공산 그룹은 민족통일전선 창설을 위해 진력할 것’을 요구받은 것이다.

서진문, 간담회 참관자로 동지들에게 인사

서진문은 일본에서 조선인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사회주의 계열 항일혁명가로 자신의 사상과 실천 방향을 정한 상황이었다. 서진문과 김천해 등은 일제강점기 국내 사회주의운동 그룹 중 북풍회에 속한다. 북풍회는 1922년 동경에서 조직된 유학생 중심의 사회주의운동그룹 ‘북성회’ 회원들이 귀국해 조직한 단체다. 중심인물 김약수는 관동대학살 이전부터 김천해와 연결돼 있었다. 북성회는 1925년 1월 3일 조직을 강화하며 ‘일월회’를 조직했는데 김천해와 서진문이 모두 연결돼 있었다.

신간회 결성을 촉발한 1926년 11월 15일 ‘정우회 선언’을 주도한 안광천(1897~?)도 김천해, 서진문이 일본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였다. 안광천은 도쿄에서 북성회와 일월회 활동을 하다 귀국했으며, 1926년 12월 6~7일 열린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책임비서를 맡았다. 그는<조선일보>에 ‘조선 사회운동의 의식상의 진통’을 연재해 ‘정우회 선언’의 배경과 진의를 밝혔다.

신간회가 국내에서 결성된 이후 석 달도 되지 않아 재일조선인단체로 신간회 도쿄지회가 결성됐다. 민족주의 계열의 조헌형, 전진한과 사회주의 계열 강소천, 한림 등이 주도했다. 이후 교토, 오사카, 나고야에도 지회를 결성했다. 조선공산당 공판에 감시단을 파견한 재일조선인단체 중 신간회 도쿄지회가 있었고 재일조선노총 등과 국내 행보를 같이했다.

서진문은 울산의 동지들보다 조직결성을 직접 목격하고 함께 활동했던 경험을 갖고 울산 간담회를 참관했다. 그는 신간회를 매개로 집결하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위한 통일전선의 불길이 울산에 옮겨붙는 것을 확인했다.

서진문은 간담회가 끝나고 초대연으로 옮긴 자리에서 울산 사회단체 회원들과 조국의 독립운동이 새로운 방향 전환에 들어갔음을 확인했다. 서진문이 간담회 참석자들에게 재일노총 가나가와조선노조 상무집행위원 자격으로 참관 소감을 밝혔다는 부분은 당시 신문 기사에 실려 있다. 서진문뿐만 아니라 김해농민연맹 노백용, 양산청년회 전혁(전병건)도 참관했다.

서진문, 울산 일정 마치고 요코하마로

서진문이 밝힌 소감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참석자 모두의 건투를 빌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주최단체인 오월청년동맹, 간담회와 초대연에 참석한 청중들은 서진문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우였으며, 동면청년회 활동을 함께 했던 동지였다. 성세빈, 박학규 등은 서진문을 통해 김천해의 소식도 접하고 일본에서 고군분투하는 동무들의 이야기를 경청했을 것이다.

서진문은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이 어떻게 재일노총으로 뭉쳤는지, 재일 조선인사회가 어떻게 단결하고 있는지도 생생하게 전달했을 것이다. 청중들은 그동안 읽었던 신문 기사로 짐작했던 서진문의 활동에 귀를 기울이며 동향 출신이 앞장선 일본 활동에 크게 고무받았을 것이다. 아울러 서진문과 김천해 등이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을 이끄는 핵심 운동가로서 성장했다는 사실에 큰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서진문이 고향 울산에서 공적인 활동에만 나선 것은 아니다. 일본으로 떠날 때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던 딸 정자와 짧지만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서진문의 딸 정자는 아버지가 울산에 와 함께 마을 동편 산에 올랐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그중 소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전해준 아버지 서진문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일산진 우리 마을 동편 해돋이 동대산(東臺山) 등선 소나무 숲을 바라보시면서 ‘바람이 쉬지 않고 항상 불고 있을 때까지는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줄 알고, 바람이 자면 내가 죽은 줄 아시요.’ 하시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어느 해인가 무슨 일로 잠시 귀국하였다가 마지막인 여섯 번째 도일하기 직전에 뒷마당 채소밭 흙담 밑에 핀 개나리 꽃나무를 뽑아다 어머니께서 부엌일 하실 때 뒷문을 통하여 쉽게 볼 수 있는 곳에다 옮겨 심으시면서 ‘이 꽃이 생생하게 살아있으면 내가 살아있는 것으로 알고, 이 꽃이 시들어지면 내가 죽은 줄로 아시요.’ 하셨다.” -서정자 회고글 <독립투사 아버지 ‘서진문’을 회고(回顧)합니다> 중에서

서정자의 기억이 맞다면 아버지 서진문이 1927년 말 다시 일본 가나가와현으로 되돌아가는 마음은 꽤 비장했다고 볼 수 있다. 서진문이 일본으로 되돌아가 공식석상에 등장하는 것은 1927년 12월 3일이다.

배문석 시민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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