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과 같은 비기축통화국에 환율은 ‘생명줄’이다. 특히 한국 원화와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화의 교환 비율인 원·달러 환율이 중요하다. 원·달러 환율은 올라도 걱정이고 떨어져도 걱정이지만, 그래도 한쪽을 고르자면 떨어지는 편이 낫다. 다른 나라와의 교류에 필수적인 달러는 한국에서 만들어낼 수 없고, 여러 활동을 통해서야 획득할 수 있다. 수출, 해외투자를 통한 배당금 유입, 외국자본의 한국 유치 등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달러를 얻을 수 있다. 원·달러 환율 하락, 즉 달러 대비 한국 원화 가치의 상승은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구하기 어렵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니 기본적으론 반길 일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한국 경제의 심각한 위기는 달러 유동성이 희소해질 때, 즉 이 땅에서 달러를 구하기 힘들 때 나타났다. 외환보유액이 바닥을 드러냈던 외환위기, 미국 대형 금융기관들의 파산으로 글로벌 달러 순환에 문제가 생겼던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한국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내몰렸다. 달러가 희소해지면서 원·달러 환율은 급등했는데, 1997년 외환위기 때는 2000원,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는 1597원까지 치솟았다. 자유변동환율제가 시행된 이후 원·달러 환율이 가장 높았던 때가 두 시기였다.
중앙은행은 금융위기 국면에서의 소방수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중앙은행은 금융 시스템에서 위기가 발생했을 때 ‘일시적인 유동성 경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제 주체들에 유동성을 공급해 파산을 막는 ‘경제의 최종 대부자’ 역할을 요구받는다. 원화 유동성 부족은 한국은행이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할 수 있는데, 달러는 한국은행이 공급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외환위기 국면에서는 국제통화기금(IMF)이 구제금융을 통해 달러의 최종 대부자 역할을 했고,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와 맺은 통화스와프를 통해 달러 유동성이 공급됐다.
달러 희소 때 한국 경제 위기
환율은 이종 통화 간의 교환 비율이어서 원·달러 환율은 한국과 미국의 경제 여건 변화를 반영해 결정된다. 한국의 경제 여건에 큰 변화가 없더라도, 미국 상황이 크게 변하면 원·달러 환율은 이를 반영해 움직인다. 최근 원·달러 환율 변화의 다이내믹스도 미국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초 1480원대까지 상승했던 원·달러 환율이 7월 초 1350원대까지 하락했다가 최근 다시 상승해 1380원대에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7월 초까지의 원·달러 환율 하락은 트럼프 정부의 감세에서 비롯된 미국 재정건전성 악화에 대한 우려와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문제 해결을 위한 인위적인 달러 약세가 나타날 수 있다는 관측, 연방준비제도의 조기 금리 인하 가능성이라는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면서 나타났다. 최근 원·달러 환율의 반등은 미국의 조기금리 인하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환율 변동의 동력이 거의 미국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에 최근의 원·달러 환율 하락세는 ‘원화 강세’라기보다 ‘달러 약세’로 부르는 게 적확할 것 같다.
역사적으로 달러는 세 차례에 걸쳐 장기 약세를 나타냈다. 주요 선진국 통화들과 미국 달러 가치 변동을 측정하는 달러 인덱스 기준 달러 가치가 31.1% 하락했던 1971년 7월~1978년 10월이 1차 달러 약세 국면, 52.4% 하락했던 1985년 2월~1992년 8월이 2차 달러 약세 국면, 41% 하락했던 2001년 7월~2008년 4월이 3차 약세 국면이었다.
세 시기의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재정수지와 경상수지 적자라는 소위 쌍둥이 적자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국면이었다. 재정수지 적자야 미국 내부 문제지만, 무역수지 적자는 교역을 통해 그만큼의 흑자를 보는 상대국들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은 무역수지 적자라는 대외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에 대해 인위적인 달러 약세를 수용하라고 강권하곤 했다.
1970년대 초는 미국 무역수지가 본격적으로 적자로 반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닉슨은 달러의 금태환 중단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닉슨의 조치 이후 금에 의해 보증되던 달러 가치는 급전직하했다. 1980년대 중반의 달러 약세는 플라자합의라는 선진국 간의 환율 공조를 통해 나타났다. 미국은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컸던 일본 엔과 서독 마르크 대비 달러의 인위적 약세를 조장했다. 2000년대 초반의 달러 약세 국면에서는 국가 간 명시적인 환율 공조는 없었지만, 당시에도 미국이 대미 무역수지 흑자 규모 1위 국가였던 중국의 위안화 강세를 압박하는 모습이 나타나곤 했다.
환율 조정 통한 불균형 해소 실패
최근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 스티븐 미런은 관세 부과뿐만 아니라 과도하게 부풀려진 달러 가치를 약하게 만들어야 글로벌 불균형이 완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5월 초 한·미 관료들의 무역협상 자리에서도 환율이 의제로 올랐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다만 환율 조정을 통한 글로벌 불균형 조정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글로벌 불균형은 언제든지 달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미국인들이 행한 과소비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규모 축소는 미국 경제가 심각하게 후퇴했던 위기 국면, 즉 미국인들의 소비 환경이 극도로 악화됐던 시기에 나타났다. 1990년대 초 주택대부조합 파산에 따른 경기 침체 국면과 모기지 시장이 총체적으로 붕괴했던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에서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줄어들었다.
환율 조정이 미국의 대외 불균형을 완화하지는 못했지만, 미국 이외 자산시장에 버블을 만드는 기제로 작동하기는 했다. 달러가 약해지면, 달러로 표시된 자산, 즉 미국 자산의 투자 매력은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통화 가치가 높아지는 국가의 자산에 대한 투자 메리트가 커진다. 1970년대와 1980년대, 2000년대의 달러 약세 국면에서는 모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증시가 급등했다. 달러 가치 하락 과정에서 나타나는 글로벌 투자자금의 선호 변화가 극적으로 자산가격에 투영됐던 셈이다. 최근 한국 증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외국인 매수세 역시 상법 개정에 따른 지배구조 개선 기대와 함께 약달러에 대한 기계적 반응의 결과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