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은폐설’로 기득권 공격하던 마가 진영
‘해결사’로 신격화한 트럼프의 외면에 배신감
미 언론 ‘엡스타인·트럼프 친분’ 보도 후 폭발
일부는 “WSJ가 ‘딥스테이트’” 트럼프 옹호론

‘제프리 엡스타인 사건’을 둘러싼 미국 공화당과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 내 분열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이후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이 그간 마가 진영을 배반한 것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세계의 경찰’ 노릇을 그만두겠다던 약속과 달리 이란을 폭격하며 전쟁에 직접 발을 담갔고, 메디케어 등 저소득층 복지 예산을 대폭 삭감한 ‘크고 아름다운 하나의 법안’은 트럼프 주 지지층인 저학력 노동계층에 직격탄을 날릴 예정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자신들의 생계 기반을 잠식하든 말든 굳건하기만 했던 마가 진영의 대오는 엉뚱하게도 ‘죽은 엡스타인’ 때문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는 엡스타인 사건이 ‘마가 세계관’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믿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가의 가장 열렬한 지지 세력은 ‘큐어넌(QAnon)’ 신봉자들이다. 큐어넌은 2017년 미국 극우성향 인터넷 커뮤니티인 ‘포챈’(4chan)에 전직 미국 고위 정보국 직원을 자칭해 글을 올리던 ‘큐(Q)’라는 닉네임의 유저에서 비롯된 음모론이다.
이들은 미국이 소아성애자, 미성년 성매매업자, 사탄숭배자들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에 의해 통치되고 있으며, 딥스테이트(선출되지 않은 그림자 정부)가 이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믿는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 등 친 민주당 엘리트들이 주된 공격 대상이다.
큐어넌 신봉자들이 마가 진영 내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일부’라 치부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지난해 미국 공공종교연구소(PRRI)와 AP통신 등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15~20%가 큐어넌의 핵심 주장을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에게 엡스타인 사건은 큐어넌 음모론이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여겨져 왔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 게이츠 전 CEO 등 정·재계 권력자들과 두루 친분을 나눴던 엡스타인은 미성년자 성 착취 혐의로 체포된 뒤 2019년 교도소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억만장자 금융인이다. 마가 지지자들은 “엘리트에게 미성년자 성매매를 알선하다가 딥스테이트에 의해 감옥에서 ‘타살’ 당한” 엡스타인 사건 파일이 공개되기만 하면, 그동안 은폐돼 왔던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라 믿었다.

마가 진영의 믿음을 배반한 ‘구세주 트럼프’
미국에는 이전에도 존 F 케네디 암살 배후에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가 있다는 등 수많은 정치적 음모론이 존재해 왔다. 하지만 큐어넌은 실존하는 특정 정치인을 ‘구세주’ ‘메시아’로 믿고 있단 점에서 이전의 다른 음모론과도 차별성을 지닌다. 바로 그 ‘구세주’가 트럼프 대통령이다.
큐어넌과 마가는 민주당 엘리트와 대척점에 놓여있는 트럼프 대통령이야말로 ‘소아성애 엘리트 조직’과 싸워서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자 영웅이라 믿는다. 그래서 트럼프 대통령의 부패 혐의나 부정선거 선동 혐의 등에 대한 수사는 모두 ‘딥스테이트’를 해체하려는 영웅에 대한 핍박과 박해라 여겼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를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십분 활용해 왔다. 집권 1기 때는 공개적인 큐어넌 지지자인 마이클 플린을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기용했고, “(큐어넌이) 애국자라고 들었다. 만약 내가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2022년에는 큐어넌의 슬로건인 ‘폭풍이 온다’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공유하고, 큐어넌을 상징하는 ‘Q’ 옷핀을 달고 있는 사진을 게시했다.

자신이 재집권하면 당장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 귀환’은 마가 지지자들에게 ‘약속된 예언’의 실현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팸 본디 법무장관은 지난 2월 “지금 내 책상 위에 ‘엡스타인 파일’이 놓여 있다”고 과시했다.
하지만 음모론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기밀 파일을 해제했는데 알고 보니 음모론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혹은 반대로 ‘구세주’라 믿었던 사람이 사실은 엡스타인과 한패였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바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엡스타인 관련 파일을 광범위하게 들여다봐 온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은 최근 ‘명단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발표했다. 이후 마가 진영 내에서 역풍이 일자,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자들이 헛소리에 넘어갔다”며 자신이 부추겼던 ‘엡스타인 사건’을 음모론 취급하고 나섰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긴커녕 트럼프 대통령과 엡스타인의 친분을 폭로하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뉴욕타임스 보도가 잇따르면서 이제는 명단 안에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쏠리고 있는 형국이다.

음모론은 현실의 또 다른 거울…“쉽게 깨지지 않을 것”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에즈라 클라인은 사견임을 전제로 “그동안 많은 대형 로펌들이 엡스타인 사건 관련 소송을 진행해 왔음에도 ‘고객 리스트’를 찾지 못한 것은 적어도 ‘굵은 글씨로 표시된 명단’이 없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클라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한 측면은 음모론의 일부가 사실이라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수십 년을 돌이켜보면 오랫동안 성폭력을 저질러 왔던 영화계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과 유명 코미디언 빌 코스비,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등 실제로 엘리트 사이에서 은폐돼 온 기괴한 성 학대 스캔들이 수없이 있었다”면서 “이로 인해 형성된 음모론은 너무나 총체적이어서 어떤 정부, 어떤 로펌, 어떤 언론도 그것을 깨뜨리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엡스타인 사건의 파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 세력을 얼마큼 분열시킬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이 엡스타인의 50번째 생일에 여성의 나체가 그려진 외설적인 축하 편지를 보냈다는 WSJ의 보도 이후 “트럼프 대통령을 ‘공동의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마가 진영이 다시 단결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트럼프의 책사’로 불렸던 스티브 배넌은 “트럼프를 공격하는 미디어들이 바로 딥스테이트”라고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엡스타인 파일을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요구만큼은 여전히 잦아들지 않고 있다. 향후 트럼프 대통령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자칫 ‘마가 세계관’과 ‘구세주’로서의 트럼프 대통령 지위 자체가 흔들릴 위험은 여전히 상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