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은 ‘지브리풍’이다

2025-04-23

그 소년을 기다리는 설렘을 기억한다. 1982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의 일이다. 매주 금요일 초저녁엔 TV 앞에 대기했다. 만 열 살 초등학생에게 ‘미래소년 코난’은 친구이자 영웅이었으니까. 주제가 전주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푸른 바다 저 멀리~’로 시작하는 가사는 왜 그리도 희망찼는지. 만화 좋아하는 아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던 어머니가 결국 옆자리 팬이 된 것도 향수 어린 추억이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깃발 휘날리는 돛대에 선 코난과 라나의 모습이 컴퓨터 배경화면처럼 머릿속에 저장돼 있다. 국민 응원가였던 “우리들의 코~난”을 얼마나 외쳤던가. 대륙이 바다에 잠긴 만화 속 미래가 2008년이었다. 이젠 과거소년이라 불러야 할 그의 유쾌한 에너지가 그립다.

‘미래소년 코난’으로 친숙한 그림체

AI가 순수·선의에 대한 향수 불러

편 가르기 아닌 선한 연대감 원해

최근 ‘지브리풍(風)’이 세계적 화제가 되면서 40년 넘은 기억이 떠올랐다. 지브리는 일본의 천재 작가 미야자키 하야오(84)가 1985년 설립한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 이름이다. 미래소년 코난은 지브리 설립 전인 1978년 NHK가 제작했다. 하야오가 감독을 맡았기에 지브리풍의 원조 격이다. 지브리 스타일은 오픈AI의 생성형 인공지능 챗GPT가 이미지 생성 기술을 진화시키면서 벌어진 유행이다. 일상의 사진을 제시하고 “지브리풍으로 바꿔줘”라고 주문을 외우면 하야오의 손길을 거친 듯한 그림체로 마법 같은 변신이 이뤄진다.

한국도 지브리풍이 강하게 몰아쳤다. 챗GPT 신규 가입자 수가 한 달 만에 두 배로 늘었다.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찍은 사진이 지브리풍으로 변환돼 메신저방에 올라왔다. 그 그림체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 말고도 여럿이라는 게 신기했다. 하야오와 지브리가 창조한 세계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느낀다. 비슷한 외모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 꾸준히 우리 곁에 있었으니. ‘빨강머리 앤’(1979년),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귀를 기울이면’(1995),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등 제목만 들어도 등장인물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돈다. 지브리풍으로 변한 친구 사진이 더 친근한 이유다.

지브리풍의 유행은 역설적이다. 디지털 신기술이 아날로그 옛 감성을 솟구치게 해서다. 챗GPT의 첨단 AI 기술의 경이로움에 감탄할 겨를도 없이 지브리풍 감성에 젖게 된다. 오픈AI 측도 이전보다 훨씬 빠른 이용자 증가에 놀라고 있다. 기술이 인간의 감성을 자극했을 때의 확장력이 무궁무진하다는 얘기다. 텍스트보다 10배 더 드는 전력, 저작권 해법 등 현실적 논란은 다음 문제다.

지브리풍 감성은 순수하면서도 강인하다. 하야오나 지브리는 잘 몰랐어도 애니메이션에 담긴 꿈과 희망, 사랑과 우정, 모험과 환상에 푹 빠졌다. 주인공의 여정엔 늘 ‘상실과 극복’의 서사가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선의와 정의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주인공에 흐뭇해 하며 연대감을 느꼈다. 잠재돼 있던 인류애를 챗GPT의 마법이 일깨워 준 것이다.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인들은 그래서 지브리풍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심은 지브리풍이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상실감도 끝내 이겨내는 선한 마음과 연대감이 근본이다. 환한 미소, 착한 심성이 결코 싸움에서 지지 않기를 응원한다. 내 살길을 찾느라 쉽게 편을 가르고 거짓과 타협하는 건 우리 스타일이 아니다. 상대를 윽박지르고 겁을 주면서 힘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집과 가족을 잃고 나 홀로가 돼도 희망을 잃지 않은 코난과 라나가 그랬고, 마법에 걸린 부모를 구하려고 이(異)세계의 공포를 견딘 치히로가 그랬다.

추악함을 순수함으로 무찌르는 저력이 지브리풍 민심이다. 계엄과 탄핵으로 헌법과 민주주의가 초토화됐어도 선하고 정의롭게 다시 시작하면 된다. 당장은 미래소년이 안 보여도 끝까지 찾아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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