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 몇 달 화면 속 세상은 유독 어지러워 보였다. 톱스타들의 일그러진 행태와 잘못 기획된 파티. 일이 터진 뒤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건 쉽다. 하지만 대중의 감각과 점점 멀어져 또 다른 ‘귀족층’처럼 살아가는 모습에서 일탈은 이미 예정된 수순처럼 느껴졌다. 절제와 겸손을 잃은 만용, 물질의 남용과 탐욕. ‘그들만의 세상’이 쌓은 벽을 경계하지 않으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그래서일까. TV와 유튜브 속 풍경은 유독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도 올해 기억해둘 만한 변화와 감동의 장면들도 분명 있었다. 연말은 그런 장면들을 다시 돌아보며 새 희망을 품기에 좋을 때다.
암투병 사실 공개한 박미선씨
대회 출전한 장애인과 천재견
2025년 감동을 선사한 얼굴들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이는 박미선(사진)이다. 암 투병 사실을 밝히며 그는 거의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로 ‘유퀴즈’에 등장했다. 쑥스러운 듯 웃었지만, 그 짧은 머리는 작은 용기가 아니었다. 암은 흔해졌다고들 하지만 결코 가벼운 병이 아니다. 특히 치료 과정에서 머리카락을 잃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깊은 상실로 다가온다. 그런데 한국의 대표 토크 쇼에서 그것을 숨기지 않고 화면에 드러낸 여성 연예인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며칠 전엔 유튜브에서 완전한 삭발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전 몇 달 동안 병 소식만 있고 얼굴을 보이지 않던 박미선과, 드러낸 이후의 박미선이 암환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얼마나 다를까. 그의 용기는 분명 누군가에게 닿았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당신 덕분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댓글 속 고백들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의 고통을 감추지 않고 세상과 나눌 때, 그것은 누군가가 절망을 딛고 일어설 든든한 지지대가 된다.
올해 또 다른 상징적 장면 중 하나는 ‘만삭의 앵커’였다. MBC 뉴스데스크 김수지 앵커와 JTBC 뉴스룸 한민용 앵커는 출산을 앞둔 상태에서도 뉴스 데스크에 앉았다. 배가 불러 재킷이 채워지지 않아도, 화면 너머로 풍성한 배가 고스란히 드러나도, 그 모습 그대로 뉴스를 전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화면 속에서만 사라져 있던 현실을 정면으로 드러낸 장면이었다. 일상에서는 수없이 마주치면서도,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임신한 직장 여성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특히 유리천장을 뚫고 올라온 프라임타임 뉴스의 여성 앵커라면 더더욱.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생명을 품은 여성들이 중요한 자리에 서서,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들의 일을 해냈다. 잠기지 않는 재킷과 숨길 수 없는 배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는 시대 변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출산율 대책이나 구호보다 더 큰 메시지는 결국 화면이 보여준 현실이었다. 임신한 여성에게 필요한 배려를 하고, 그들이 일을 잘해낸다는 사실만 보여주면 되는 것. 그 간단한 진실을 화면이 명확하게 입증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래전부터 함께 존재해왔지만,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처럼 지워져 온 이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들이다. 한국의 도심은 세계에서도 장애인을 보기 힘든 곳이라고들 한다. 같은 공간에서 살지만, 서로의 시야에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존재들.
TV ‘동물농장’과 유튜브에서 시각장애인 한솔과 천재 강아지 토리의 어질리티 대회 도전기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우리는 수많은 천재견과 장애인을 돕는 안내견들의 감동스토리에 이미 익숙하다. 하지만 이 장면의 주도권은 보이지 않는 주인 한솔에게 있었다. 그는 장애물 사이를 달리며 “점프!”라고 외쳤고, 토리는 망설임 없이 정확히 뛰어올랐다. 그 눈빛에는 서로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었다. 부족함을 덮어주고 가능성을 확장해주는 이상적인 파트너십이었다.
“100번 안 되면, 1000번 하면 되죠.” 세계 최초 점자 골드버튼을 받은 유튜버 한솔은 미디어 플랫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소셜미디어의 부작용은 쉽게 많이 말할 수 있지만, 이 장면만큼은 장애의 벽과 신체의 한계를 가볍게 넘어 한 인간의 세계를 넓혀주고 있음을 믿게 했다.
어질리티 대회의 체코인 심사위원은 그 나라의 속담을 말했다. “될 방법을 찾는 자는 길을 찾고, 안 되는 이유만 찾는 자는 길을 못 찾는다.” 이 말은 또 다른 장면과도 이어졌다. ‘신인감독 김연경’에서 김연경은 애증의 제자 인쿠시에게 말했다. “안 되는 핑계 백 가지를 찾지 말고, 되게 만드는 해결책을 찾아.” 인쿠시는 화면 속 실패자에서 현실의 프로구단 입단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그 말들은 결국 내 마음 한쪽도 번쩍 깨워놓았다.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누군가가 건네는 단단한 문장을 그대로 새해의 다짐으로 만들기로 했다. 새해 결심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다시 결심해본다. 안 되는 이유를 세며 주저앉았던 올해를 뒤로하고, 되는 길을 찾아 나서는 새해가 되기를.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