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5년 4월 15일 오전 7시 22분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사진)이 숨을 거두었다. 향년 56세.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사실상 끝난 지 고작 닷새만의 일이었다. 전날 밤 10시쯤 워싱턴DC의 포드 극장에서 남부연맹 지지자 존 윌크스 부스의 총에 맞아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부스는 단독범이 아니었다. 총 8명의 공범이 앤드루 존슨 부통령, 윌리엄 H 수어드 국무장관, 율리시스 그랜트 북군 총사령관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암살을 시도했다. 수어드와 그의 자녀, 국무부 직원 등이 부상을 입었으나 실제로 목숨을 잃은 것은 링컨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어드를 의심하는 음모론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하지만 학계의 정설은 반대다. 가난한 농민 출신 링컨은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고 정계에 입문해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수어드 등 쟁쟁한 경쟁자들과 마주했다. ‘언더독’ 링컨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하여 대통령이 된 후 본인과 맞서 싸웠던 정적과 민주당 출신까지 아우르는 거국 내각을 제안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도리스 컨스 굿윈의 책 제목처럼 ‘라이벌로 이루어진 팀(Team of Rivals, 한국어판 『권력의 조건』)’을 구성하는 정치적 천재성을 발휘한 것이다.
수어드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링컨은 수어드를 번번이 제압하면서도 포용했다. 결국 링컨의 가장 든든한 각료 겸 친구가 된 수어드는 피격을 당해 부상을 입은 상태로 링컨의 부고를 듣고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역사의 일부가 되었군.”
느닷없이 발생한 대통령의 빈자리, 그리고 다시 찾아온 정치의 계절.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문득 링컨의 위대함을 되새겨 본다. 정적과 손을 잡고 라이벌로 팀을 꾸려서라도 국난을 극복해 나가는 천재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