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놈들 전성시대, 착한 영화가 보고 싶다

2025-04-24

꽤 오랜 시간, 여러 나라에서 만들어진 갖가지 영화들을 봤다. 한국영화 수준은 형편없고, 상영하는 외국영화 수도 많지 않던 시절에도 극장들이 모여 있던 종로, 을지로, 충무로를 자주 찾았다. 영화에 깊이 빠져든 적도, 잠시 멀어진 적도 있었지만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선호도는 일관됐다고 생각한다. 착한 사람들이 보상받는, 순하고 따뜻한 영화들에 끌렸다. 깊이 없다는 말도 들었지만, 퍽퍽한 현실에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도 좋지만 어두운 극장에서 보내는 두 시간의 행복은 지금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취향 때문인지, 좋아하는 감독들도 진지한 시네필들과는 다르다. 예술영화로 유명한 거장보다 직관적이고 따뜻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더 좋았다. 프랭크 카프라의 1930~1940년대 작품들을 사랑한다. 착한 사람들은 결국 행복해진다는 동화 같은 메시지를 담은 <어느날 밤에 생긴 일> <스미스씨 워싱턴 가다> <멋진 인생> <우리 집의 낙원> 등의 DVD는 우울할 때마다 돌려봤다.

동시대 좋아하는 할리우드 감독은 스웨덴 출신의 라세 할스트룀이다. <개 같은 내 인생>으로 유명해졌지만, 그는 미국으로 건너와 <길버트 그레이프> <사이더 하우스> <쉬핑뉴스> <사막에서 연어낚시> <베일리 어게인> 등 별 셋이나 별 셋반짜리 휴머니즘 상업영화를 주로 만들었다. 거장과는 거리 있는 필모그래피지만 그의 영화를 보고 나면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쉬핑뉴스> 속 폭풍우 뒤 맑게 갠 바다를 보며 마음도 맑아졌다. 이 영화를 좋아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원작소설을 구해 읽기도 했다.

한국 감독 중엔 <완득이> <증인> <달짝지근해> 등을 만든 이한 감독을 좋아한다. 인간의 선함을 믿는 그의 영화들을 지지한다. <증인>의 유명한 대사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는 여느 거창한 대사보다 직관적이고 감동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사가 맘에 들어 이전 칼럼의 제목으로도 사용했다. 쓸데없는 자존심과 욕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이 말을 읊으면서 스스로를 다스렸다.

굳이 착한 영화에 대해 구구절절이 말한 것은 나쁜 놈들이 활개치는 현실이 매우 답답해서다. 착한 영화에선 악인들도 참회하는 순간이 오는데, 현실의 악당들은 도무지 잘못을 뉘우칠 생각이 없다. 파면되고도 궤변만 늘어놓는 내란 수괴, 윤석열 하수인 노릇 하는 한덕수, 내란 수괴를 풀어준 심우정과 지귀연 등 법조카르텔, 탄핵을 반대하는 집권여당 등.

그래서 이 순간 생각나는 영화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다. 지금 윤석열과 그 잔당들의 행태는 영화 속 악인들보다 더 지독하고 나쁘다. “어데서 내를 감옥에 처넣노? 심우정 델꼬와. 니 내 누군지 아나. 느그 검찰총장 아크로비스타 살제, 내가 인마 느그 총장이랑 어저께도 으에 같이 밥 묵고 으에 싸우나도 같이 가고. 마 다했어.”

지금은 세계적 거장이 된 어떤 감독이 2004년 서울극장에서 열린 자신의 영화 기자시사회 때 했던 말이 생각난다. “투자자에겐 기쁨을, 관객에겐 고통을.” 그의 작품들은 폭력적이고 잔혹한 장면 묘사 등을 통해 인간 심리의 어두운 면을 섬세하게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작품에도 꽤 잔인한 설정과 장면이 포함돼 있었고, 고백건대 기자는 그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 당시가 불현듯 떠오른 것은 내란 수습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들이 보여준 공감 없음과 뻔뻔한 저항이 웬만한 공포영화 못지않은 오싹함을 안긴 탓이 아닐까.

험한 세상, 착한 영화나 감동적인 영화가 보고 싶다. 기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학비를 대줬다는 김장하 선생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역주행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럴싸한 서사도 없고, 거창한 특수효과도 없는 이 소박한 다큐멘터리가 뒤늦게 인기를 끄는 것은 평생 나눔을 실천해온 김장하 선생의 담백한 삶이 주는 울림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 속 김장하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돼서 죄송합니다. 내가 그런 거 바라는 것 아니다.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득권층에 진저리나는 요즘, 이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깨끗해지고 마음까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김장하 선생의 삶이 귀하고, 이 다큐에 감동받은 많은 보통 사람들이 있다는 데 위안받는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