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신진서를 1인자로 만들었나-“나를 키운 건 기재 이상의 책임감이었다”

2025-03-12

63개월. 5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한국 바둑 1인자의 위치는 단 한 사람, 신진서 9단(24)이 지키고 있다. 오랜기간 1인자의 위치를 지켜오면서 그의 위상은 이제 한국을 넘어 세계가 인정하는 ‘최강’의 위치로 올라섰다. 바둑에 관해 자존심이 강한 중국 기사들도 신진서는 인정한다. 故 조남철 대국수를 시작으로 김인,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으로 이어졌던 한국 바둑 1인자의 계보를 훌륭하게 이어받았다.

지난 10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신진서는 지난해를 돌이켜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진서는 “자잘하게 아쉬운 부분이 많았어도 어느 하나 콕 집어서 가장 아쉽다라고 할만한 건 없었다. 아픈 패배도 있었지만, 나 스스로에게 용납이 안되는 패배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며 “세계대회에서도 다소 아쉬웠는데, 그래도 결승에서 지는 것보다 중간에 빨리 떨어지는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종국까지 간 대국은 다 이겼다”며 미소를 지었다.

늘 그랬듯, 신진서의 2025년 역시 시작이 화려하다. 우선 지난 2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한국의 마지막 주자로 나와 2연승으로 한국의 대회 5연패를 확정지었고, 숨돌릴틈없이 싱가포르에서 곧바로 진행된 제1회 난양배에서는 중국의 신흥 강자 왕싱하오 9단을 2-0으로 누르고 통산 8번째 메이저 세계대회 우승에 성공했다. 메이저 세계대회 기준으로, 신진서보다 더 많은 우승을 차지한 기사는 이창호(17회), 이세돌(14회), 조훈현(9회) 3명 뿐이다.

11일 열린 박정환과의 제26기 맥심커피배 8강전 승리까지 더해 올해 치른 15번의 대국을 모두 이겼다. 지난해 12월 전적까지 더하면 현재 19연승 중이다.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최초의 연간 승률 90%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페이스다. 신진서는 “확실히 신경을 많이 쓴 것은 맞다. 그리고 그만큼 결과가 나와서 좋다”면서도 “출발은 지난해가 더 좋았다. 그런데 이후가 좀 아쉬웠다. 그래서 올해는 지난해처럼 되지 않게 더 신경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세계바둑은 신진서로 인해 한국 바둑이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못하다. 냉정하게 평가해 신진서를 포함해 톱레벨에 있는 몇 명의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중국 기사들을 상대로 확실한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기사가 없다.

신진서는 현 중국 바둑의 상황을 두고 한국 양궁, 중국 탁구와 비교했다. 다시 말해 내부 경쟁이 세계대회 경쟁보다 더 치열하다는 뜻이다. 신진서는 “어떤 중국 기사들은 한국에 온다면 못해도 3위까지 할 것 같은데 중국에서는 10위권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며 “물론 그들이 운이 좋지 않아 한국의 톱레벨 기사들하고만 맞붙는다면 모르겠다. 그래도 중국 바둑의 차세대 주자로 꼽히는 왕싱하오나 투샤오위 9단이 아마 한국에서 활동했으면 날아다녔을 것”이라고 했다. 반대로 말하면 이런 중국 기사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신진서가 대단한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중에는 ‘뭔가를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는 것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려면 노력을 넘어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단계까지 가야한다는 뜻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1인자인 신진서도 이제는 바둑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을까. 그런데 신진서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답변을 내놨다.

신진서는 자신을 1인자로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은 기재도, 노력도, 즐기는 것도 아닌 ‘책임감’이라고 했다. 다만, 그 책임감의 의미가 약간은 씁쓸하다. 마치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심정처럼 ‘내가 무너지면 한국 바둑이 무너진다’라는 의미의 책임감이다.

신진서는 “메이저 세계대회를 8번 우승한 지금은 내가 최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릴적 중국 기사들과 대국할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내가 어릴 때 온라인에서 판팅위 9단을 만나면 나랑 대국해주는 것 자체로 고마워해야 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났다. 미위팅 9단이나 양딩신 9단도 온라인 대국을 하면 어려운 상대들이었다. 중국 기사들과 숱하게 대국하면서 천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기사들이 너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제 저들 중 신진서보다 커리어가 나은 기사는 한 명도 없다. 이를 두고 신진서는 “어느 순간부터 ‘한국 바둑은 너 아니면 안돼’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들때쯤, 반대로 중국 기사들은 ‘내가 없어도 중국 바둑이 최강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이어 “중국 바둑의 내부경쟁이 워낙 치열하다보니 거기서 좀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또 세계대회 우승을 한 번 하면 생활 환경 자체가 달라진다고도 들었다”며 “반대로 나는 저 중국 기사들의 벽을 무조건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향후에도 계속 중국 기사들을 이기고, 한국 바둑도 버틸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이런 책임감 측면에서 차이가 많이 난 것 같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7살 많은 ‘전대 1인자’ 박정환을 언급했다. 신진서에게 랭킹 1위를 내주고 ‘2인자’의 위치가 된 박정환은 하향세가 시작될 3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정상권에서 한국, 중국의 후배 기사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오는 6월에 열리는 메이저 세계대회인 춘란배 결승에도 올라가 있는 상태다. 신진서는 “박정환 사범님도 계속해서 세계대회 우승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든) 중국 기사들은 이제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결국 마음가짐의 차이다”라고 설명했다.

아직 20대, 그것도 막 중반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현역 1인자’의 위치에 올라선 신진서는 조용하지만 빠른 속도로 ‘바둑계의 고트(GOAT·Greatest of All Time)’ 이창호를 추격하고 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다다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이창호의 메이저 세계대회 최다우승 기록에도 어느덧 절반 정도까지 따라왔다. 이창호가 활약하던 시대에 비해 지금은 메이저 세계대회 숫자가 더 늘어났고, 신진서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기회도 많아졌다. 물론 경쟁도 더 치열해졌다.

신진서 스스로도 자신이 기록적인 측면에서 많이 따라붙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다만, 이창호의 기록을 최종 목표로 두지는 않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신진서는 “이세돌 사범님을 넘겠다, 이창호 사범님을 넘겠다는 식의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목표로 하면 내 성격상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 것 같다”며 껄껄 웃은 뒤 “한 때 1인자의 위치를 포기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힘들 때도 있었다. 그 때랑 비교하면 지금 난 많이 성장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룰 것도 많이 이뤘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날 스스로 제한하지는 않겠다. 그냥 넓게 보고 크게 가겠다. 그러면 언젠가는 (이창호 사범님이 있는) 그 위치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자신의 시대가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자신감이 묻어나는 당찬 ‘선전포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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