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특파원 시절에 경이로웠던 나라 중에 벨기에가 있다. 1100만 명의 국가인데 ‘정부가 없는’ 상태가 이어지곤 했다. 다당제로 인한 연정(聯政)이 일반적인 유럽에서도 유독 심했다.
어느 정도 같은가. 2010~2011년엔 541일이었다. 그게 최장인 줄 알았는데, 2018~2020년엔 652일이었다.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485일, 4년이 넘었다고 한다.
“벨기에는 어떻게 652일 동안 정부가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많은 이가 질문했다. 물론 진짜 무정부 상태는 아니었다. ‘과도 정부(caretaker government)’가 있었다. 일종의 ‘땜빵’으로 관리 정도는 했다. 일상은 돌아갔다. 일반인들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은 늦춰졌다. 큰돈이 들어가는 일을 할 수도 없었다.
민주당, 예산안까지 일방처리
'대통령·정부 주도권' 헌법 무시
정부 마비 초래한 책임은 외면
어쩌면 우리도 이런 시기로 접어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헌정 사상 초유의 일들이 초유의 빈도로 벌어지고, 상상 이상의 일이 상상 이상으로 발생하던 중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예결위에서 새해 예산안을 단독 의결하는 일까지 벌이는 걸 보면서 더 했다.
우리 대통령제는 “내각제를 검토하다가 정부의 안정성, 정치의 강력성을 도모할 필요성이 있다고 해서"(유진오 박사) 대통령제가 된 유래에서 알 수 있듯, “대통령과 행정부의 주도권을 인정하는”(강원택 서울대 교수) 구조다. 야당은 비판과 견제, 장차 집권했을 때 가능성(수권 능력)을 보이는 게 본질적 역할이다.
민주당은 그 한계를 넘어섰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과 인사를 비토 놓고, 자신들의 정책과 사람들을 넣어 왔다. 감사원장 탄핵을 통해 자신들이 추천한 이가 감사원장 대행을 맡도록 하는 것이나, 양곡관리법을 계속 처리하는 게 그 예다.
예산도 마찬가지다. 첫해엔 ‘민주당 수정안’을 얘기하고 지난해엔 ‘이재명표 예산’으로 압박하더니, 올해엔 아예 ‘감액 예산안’을 예결위에서 통과시켰다. 우리 헌법이 법률과 달리 예산안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근거를 마련해두지 않은 건,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상상하지 못해서다.
이젠 대통령의 말이 대통령의 말이 아니게 됐다. 정부가 말해도 고개를 민주당에 돌리게끔 돼 있다. 사실상 ‘윤석열·이재명 (적대적) 무 정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 대통령이 이래라저래라 하지만 국회를 통해 제도화해낼 힘은 없다. 민주당도 국회에선 통과시키지만, 대통령을 넘어설 힘은 없다. 사실상 '데드록'이다. 윤 대통령은 책임질 의향은 있는데 책임질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민주당은 책임없다는 양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 결과 정부는 기능부전에 빠졌다.
중간에 낀 관료사회의 분위기가 궁금해 지인에게 연락했다. 고위 공무원은 그는 “큰 틀로는 조용한데 다들 멀뚱멀뚱하다”고 했다.
-일하긴 어렵겠다.
“아주 좋은 상황은 아니다. 사실 이 정부가 몇 년 있나 궁금할 뻔했는데, 임기 단축 개헌은 좀 어려워진 게 아닌가. 앞으로 2년6개월 어떻게 넘어갈지 다들 궁금해 한다. 돌파구 없이 이대로 갈 것 같다. 예산 하는 것 보면 알지 않나.”
그는 최근 민주당의 행태가 윤석열 정부를 조기 퇴진시키는 여론을 만들어내는 데 부정적으로 작동할 것으로 본 듯했다. 정확한 판단이다.
-예산이 제일 충격적이다.
“이대로라면 연초 추경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어떤 타협책이든 정말 정치가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쉽겠나.
“그러기엔 너무 중차대한 시기다.”
참고로 벨기에가 버틴 건 분권화 덕이었다. 연방정부 아래 6개의 정부(언어공동체 셋, 지역정부 셋)에 상당 부분 권한이 넘어가 있다. 유럽연합이란 외피도 두르고 있다.
우린 정반대다. 적대적인데 더 적대적으로 급변하는 환경에 놓여 있고, 중앙집권화돼 있다. 중앙정부가 기능부전에 빠지면? 참 무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