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도 천년 낙원이었다

2024-10-08

0.1%의 가능성이 모든 걸 바꿀 수 있다는 ‘검은 백조’를 말한 나심 탈레브는 레바논 출신이다. 그가 성장한 레바논은 그러나 지금과 달랐다. 1300년 넘도록 다종교가 공존하는 안정적 사회였다.

어느 정도인가 싶을 텐데 마론파부터 십자군전쟁 이후에도 현지에 남은 로마 가톨릭까지의 기독교도, 시아·수니파 무슬림, 드루즈교도와 유대교도 등 10여 개 종파가 대체로 서로 관용했다고 한다. 탈레브는 “아랍인들은 오직 전쟁(그리고 시), 그 뒤를 이은 오스만 제국 역시 오직 전쟁(그리고 유흥)에만 관심을 둔 터라 우리 선조들은 무미건조한 상업 활동과 덜 위험한 학술 활동(그리스 고전 번역)에 전념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어떤 기준에 따르더라도 변함없는 낙원이었다”고 했다.

1300년 간 안정적 다종교 사회가

종파 갈등에 일순간 나락 떨어져

심리적 내전 상태인 우린 안전한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 독립할 무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 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국민협약’으로 알려진, 구두의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다(1943년).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 총리는 수니 무슬림, 국회의장은 시아 무슬림이 맡는 식의 권력 분점이었다.

 그 ‘낙원’은 그러나 사라졌다. “총탄과 박격포탄 몇 발이 날아다닌 뒤 돌연 사라져버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검은 백조 한 마리가 출현하면서 천국에서 지옥으로 바꾸었다”는 게 탈레브식 표현인데, 따지고 보면 돌연한 것도, 근원을 알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건국(1948년)과 곧 이은 1차 중동전쟁, 그 과정에서 드러난 아랍 통치계급의 무능에 대한 집단적 반발로 아랍의 구체제가 무너졌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이집트 나세르의 범아랍주의에 고무된 무슬림들이 현상 변경을 원하자 마론파 대통령이 미국을 끌어들여 억눌렀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으로 유입된 팔레스타인 난민의 존재는 종파 갈등을 증폭시켰고 이내 내전으로 번졌다. 15년간 잔인한 살해가 잔혹한 보복을 불렀다. 각 정파는 미·소는 물론 시리아·이라크·이란에도 기댔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해산을 명분으로 이스라엘도 침공했다. 내전 동안 10여만 명이 숨졌고, 그 이상이 다쳤으며 수십만 명이 망명길에 올랐다.

1990년 마침내 ‘평화’가 왔으나 진정한 건 아니었다. “결코 시정되지 않을 부정의와 잔혹 행위에 대한 기억들은 평화가 선언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레바논의 많은 지역사회를 분열시켰다. 화해와 망각,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맹렬한 욕구가 결합되면서 레바논 사람들은 다시금 한 국가의 국민인 척 행동했다. 어떤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레바논인들이 국가에 더욱 헌신하게 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레바논은 언제든지 재개될 수 있는 분쟁의 위협을 결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불안한 나라가 돼 있었다.”(유진 로건의 『아랍』)

길게 썼다. 레바논은 분명 극단적 사례다. 대단히 복잡한 배경이 있다. 그러나 1300년 동안 안정적이었던 사회도 ‘일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엔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내전 초기 레바논 사람들은 “며칠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역사는 냉담했다.

비교적 최근까지 우린 ‘결국엔 나아질 것’이란 낙관을 공유했고, 대체로 나아져 왔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이나 이재명의 민주당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민망할 일들을 버젓이 실행에 옮기는 통에, 최악이 최악을 부르고, 초유의 일이 또 다른 초유의 일을 밀어내는 걸 상시적으로 보게 되면서 더는 낙관하기 힘들게 됐다. 다음 정권 때 나아질지도 회의적이다. 과거의 퇴행을 바로잡겠다고 들어선 정권들이 연이어 퇴행하고, 다음 정권을 노리는 이들도 퇴행하니 말이다. 자칫 나락이 아닌지 두렵기까지 하다.

레바논을 겪은 탈레브는 소수가 우리가 아는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며 이렇게 조언한다. ‘은율'(나에게 하기 싫을 걸 남에게 하지 말라)을 깨는 이들을 불관용 해야 한다고. 조언대로라면 불관용할 사람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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