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oongAng Plus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6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1987년 민주화로 만들어진 헌법이 6공화국 헌법이며, 이후 헌법개정이 없었기에 지금도 6공화국입니다. 6공화국의 출발이 노태우 정부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6공화국의 뿌리,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의 틀이 만들어진 시대상황을 추적하고 분석합니다.
노태우 비사
제2부. ‘5공 청산’과 전두환·노태우 갈등
7회. 전두환과 정호용의 버티기 한판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백담사행으로 진짜 노태우 정권이 시작될 수 있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이 백담사로 떠나고 9일 만에 노태우 대통령은 전면 개각을 발표했다. 다시 3일 뒤 민정당 당직을 개편했다. 6공에 남아 있던 5공의 흔적을 지운 셈이다.
전두환을 격분시킨 것은 백담사행 이후에도 계속되는 측근의 구속이었다. 6공 청와대와 백담사행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측근의 사법처리가 없어야 한다’는 다짐을 받았지만 해가 바뀌자마자 측근 구속이 이어졌다.
1989년 5월 20일 월간조선에 ‘6·29는 전두환이 연출하고 노태우는 연기한 것’이라는 사실과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정치자금 550억원 주었다’는 내막이 보도됐다. 전두환 측이 백담사행 이전부터 청와대를 향해 위협하던 바로 그 폭탄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노태우는 폭탄 보도에 격노했다. 그러나 내심 당황한 청와대는 이후 백담사에 유화 제스처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9년 5월 29일 성환옥 경호실 차장이 백담사를 찾아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폭탄선언이 언론에 공개되고 9일 만이다(‘노태우 비사’ 2부 5회 참조). 백담사 경호팀이 청와대 경호실 소속인데도 불구하고 지난 6개월간 경호실 고위 간부 누구도 백담사를 찾은 적이 없었다. 성환옥은 ‘성의’ 표시로 소형 발전기를 가지고 왔다. 전두환은 자서전에서 ‘방 안에 형광등을 달 수 있어서 한결 기분이 풀렸다’고 기록했다.
경호실의 성의 표시는 두 가지 의도였다. 첫째, 전두환의 폭탄에 놀란 6공 청와대는 백담사 측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이후 출입통제가 다소 느슨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백담사를 찾아왔다. 둘째, 더 중요한 이유는 5월 임시국회에서 전두환의 국회 증언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여야 중진회의는 5월 19일 국회의 서면 질의, 전두환의 국회 출석 증언, 그리고 TV중계에 합의했다. 전두환을 설득해야 했다.
전두환 ‘야당에 끌려다니지 말라고 전해라’

성환옥이 다녀간 다음 날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원내대표)가 ‘국회증언’을 요청하기 위해 백담사를 찾았다. 처음으로 ‘6공 핵심’ 인사가 백담사를 찾은 것이다. 김윤환은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의 공신이자 전두환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었다. 전두환은 그간 쌓였던 울분을 쏟아냈다.
“처음엔 동생(전경환 전 새마을운동본부 중앙회장)만 구속하면 된다고 했다가 다른 친인척까지 구속했고, 나중에는 대국민 사과, 재산 헌납, 은둔만 해주면 국회 증언 없이 끝내겠다고 하고서는 막상 백담사로 오니까 국회 증언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냐.”
전두환의 첫 번째 불만은 노태우의 거짓말이었다. 물론 노태우의 거짓말이 여소야대 국면에서 불가피한 점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에 계속 밀리는 노태우의 우유부단한 국정 운영에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의 국회 증언은 통치권자의 권위와 헌정 질서에 대한 훼손을 의미하기에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야당이 요구한다고 다 들어주려고 하나. 증언할 경우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야당은 그런 의도로 증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전두환 전 대통령, 가장 진노했다"
김윤환 총무가 전 전 대통령이 진노한 대목이라며 전한 이야기는 의외였다. 노태우 대통령이 친필 편지를 보냈는데 마지막에 딱 한 글자를 적었고, 그것을 본 전두환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는 것이다. 그 한 글자는 무엇이었을까.
반대로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가장 격분했던 순간도 있었다. 군 출신 두 대통령의 의전 싸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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