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완주 안심사의 언해본 목판

2025-04-24

△ 만해 한용운의 안심사 방문기

1931년 근대의 고승 만해 한용운이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안심사를 방문했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는 한글경판을 친견하고 인출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산사를 자주 방문했던 사람으로부터 안심사에 상당수의 언해본 경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남아있던 한글로 된 불교서적은 산질된〈월인천강지곡〉몇 권에 불과하다고 알고 있던 터라 만해의 놀라움을 컸다.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급히 서둘러 경성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마음이 들떠서 며칠 밤잠을 설친 뒤라 기차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곤히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기차가 추풍령역에 정차해 있었다. 호남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대전역을 한참 지나쳤다. 급하게 하차해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상행선을 타고 대전역까지 다시 올라가 호남선으로 바꿔 타고 연산역에 내렸다. 여기서 자동차로 두 시간 반을 더 달려 다음날 정오가 지나서 안심사에 도착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틀 걸러 도착한 안심사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찾아오는 신도가 없어 주지 혼자 농사를 지으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퇴락한 2층 건물의 대웅전 안으로 들어서자 불상 뒤쪽 마루에 경판이 쌓여있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판전이 있었는데 판전이 무너지면서 대웅전 안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수많은 경판이 뒤섞여 있는 가운데 한글경판이 보였다. 벅찬 감흥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만해는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경판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경판을 종류 별로 분류하고, 다시 판본 순서대로 맞추어갔다. 다음날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판본의 정리를 마쳤는데 결과는 엄청났다.

낙질이 거의 없는 판본이 5종이나 남아있었다. 〈원각경〉〈금강경〉〈은중경〉 등 경전이 3종, 여기에 〈천자문〉과 〈유합〉의 판본까지 있었다. 남아있는 언해본 판본의 수는 무려 655판에 이르렀다. 이를 인출하게 되면 1,365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만해는 이러한 자초지종을 적어 ‘국보 잠긴 안심사’란 제호로 〈삼천리〉 1935년 7월호에 실었다.

△ 한 줌 재로 변한 안심사 언해본 목판

만해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향후 판본이 어찌 될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안심사의 형편으로 판본을 제대로 관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본을 지킬 수 있는 방안 세 가지를 제시했다. 안심사에 이를 수호할 만한 보조를 해주거나 이를 수호할 수 있는 다른 사찰로 이안하는 방안, 경성에 판각을 신축한 후에 매입해서 이안하는 방안이다. 만해는 이 중에서 경성에 이안하는 방안을 실행하려한다고 밝혔으나 어떤 사정에서인지 실현되지 못했다.

경성에 판본을 이안하고자 했던 만해의 생각이 실현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3일, 만해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 벌어졌다. 안심사가 적군의 월북경로에 있다는 이유로 국군이 사찰을 징발해 소각해버린 것이다. 이때 대웅전 안에 보관되어 있던 판본도 함께 재가 되었다. ‘국보 잠긴 안심사’가 국보와 함께 사라졌다.

△ 조선 초부터 불경을 간행했던 안심사

그런데 대둔산 깊은 산속 오지 중의 오지인 안심사에 어떻게 해서 이렇게 엄청난 보물인 언해본 목판이 보관되어 있었던 걸까.

안심사는 조선 초부터 불경간행이 활발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조선 초에 발간한 한문본〈묘법연화경〉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개국공신이었던 양촌 권근이 쓴 발문에 발간경위가 적혀있다.

조계종의 대선인 신희 등이 노인들이 보기 편하도록 중간 크기의 글자로 불경을 간행하기를 원했다. 이에 성달생 성개 형제가 상중에 이를 듣고 선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글씨를 썼다. 이를 도승 신문이 전라도 도솔산 안심사로 가지고 가서 1405년(태종 5)에 이 경전을 간행했다.

이 발문을 통해 당시 안심사의 명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불경 간행을 위해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신문이라는 승려가 대둔산 안심사까지 성달생 형제가 정성을 다해 쓴 사경을 가지고 갔던 것은 이곳이 당시 가장 뛰어난 불경간행처였기 때문이다. 이는 안심사의 승려 중에 숙련된 각수와 지장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책을 출간할 수 있는 인프라가 튼튼하게 갖춰진 절이 안심사였다. 이러한 사찰이었기에 세조 때 간경도감을 설치하면서 지방분사를 이곳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단초가 영조 35년(1759)에 건립된 안심사사적비에 적혀있다. 이 비는 우의정 김석주가 비명을 짓고, 한성부 판윤 유최기가 기문을 서술했다. 이조판서 홍계희의 글씨에 영의정 유척기가 두전을 썼다. 이처럼 조정의 쟁쟁한 실세들이 참여해 비를 세운 것으로 볼 때 당시까지만 해도 안심사의 사세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안심사 주지 처능이 김석주에게 했던 말이 적혀있다.

우리 혜장왕조(惠莊王朝:세조)에 이르러 일찍이 친필로 유지(遺旨)를 내리시어 절의 중으로 관에 부역하는 자들에 대해 모두 역을 면해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글이 있습니다.

사적비에 의하면 세조가 승려들의 잡역을 면해주라는 친필 유지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조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유지를 내렸을까.

△ 안심사는 간경도감 전주분사

이는 안심사가 일찍이 명성을 쌓아온 불경간행사업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불경간행을 위한 전담기구를 설치해 많은 불경을 간행한 왕이 세조였기 때문이다. 세조는 대군 시절부터 불교를 좋아하여 부왕인 세종의 불서편찬을 적극 도왔다. 세종의 명으로 모친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석보상절〉을 쓰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위 찬탈을 속죄하기 위해 더욱 불교에 심취했다. 세조 7년(1461)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했다. 중앙에 간경도감 본사를 두고, 지방에 분사를 두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지방분사로는 개성 안동 상주 진주 전주 남원이 있다. 이 중 전주의 분사 역할을 안심사에서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역할을 하면서 불경 간행이라는 국책사업을 수행했기에 세조가 안심사의 승려들에게 잡역을 면해 주라는 어필을 내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만해가 와서 보았던 언해본 목판도 세조 때 새긴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간경도감의 역할을 보면 한문 불경은 본사와 지방분사에서 간행했지만 언해 불경은 서울 본사에서 단독으로 간행했다.

안심사에 있었던 언해본 목판은 선조의 지시로 1575년(선조 8)에 판각해서 안심사에 보관했다. 그런데 실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간경도감에서 언해한 불경을 다시 복각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 한글로 번역해서 판각한 것인지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용운이 1932년에 보수하여 인출한 〈원각경언해〉와 〈금강경언해〉는 간경도감의 원간본을 복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출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안심사

이처럼 안심사의 언해본 목판에 대해서는 풀어야할 숙제가 많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사실만으로도 안심사는 우리 출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곳이다. 조선 초부터 많은 불경을 간행했고, 세조 8년(1462)에는 한자본 불경 〈대승기신론필삭기〉와 〈대방광불화엄경합론〉을 간행했다. 여기에 선조의 명으로 판각한 언해본 판본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단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때 안심사가 조선시대 불경간행의 중심 사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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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안심사 #언해본 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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