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코인터내셔널이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과 손잡고 블록체인 기반의 글로벌 결제 시스템 도입에 나서면서 국내 금융사들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구상에 비상이 걸렸다. 한국이 규제 미비로 시간만 보내는 사이 글로벌 은행들이 예금 토큰이나 스테이블코인을 앞세워 국내 기업의 수요를 빨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23일 금융계에 따르면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전날 JP모건의 블록체인 결제 플랫폼 ‘키넥시스’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우선 해외 법인 간 송금에 키넥시스를 활용할 계획이다. 다른 해외 기업으로의 송금에도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전 세계 51개국 128개 해외 거점을 운영하고 있어 해외 법인에만 사용하더라도 상당한 규모의 거래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키넥시스는 JP모건 산하 블록체인 사업부로 같은 이름의 블록체인 기반 글로벌 결제 인프라를 운영 중이다. JP모건은 키넥시스를 통해 하루 20억 달러 이상의 결제를 처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예금 토큰 JPMD를 출시하기도 했다. 예금 토큰은 시중은행이 예금을 담보로 발행하는 일종의 디지털 화폐로 허가된 기관 간 거래에서 주로 쓰인다. 발행 주체가 다양하고 누구나 접근 가능한 퍼블릭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스테이블코인과는 차이가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MOU를 두고 글로벌 금융사가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국내 시장에 진입하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JPMD가 예금 토큰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예금 토큰과는 달리 퍼블릭 블록체인인 이더리움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데다 국내 금융사들이 구상하고 있는 기업간거래(B2B)용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사업 모델이 사실상 같기 때문이다. 수수료 절감과 빠른 송금, 환리스크 방어 등 강점도 비슷하다.
업계는 글로벌 금융사의 침투가 더 활발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키넥시스와의 MOU 외에도 일본계 글로벌 은행과 스테이블코인 결제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3대 메가뱅크 미즈호·미쓰이스미토모(SMBC)·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MUFG) 중 한 곳으로 추정된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한국은 규제조차 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글로벌 금융사들이 시장을 선점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라며 “글로벌 금융사가 미리 기반을 닦아놓으면 향후 국내 금융사들이 원화 코인을 발행해도 설 자리를 찾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실제 국내 기업들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위해 물밑 작업에 나선 상황이지만 아직 가이드라인조차 나오지 않아 본격적인 사업 추진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수개월 전부터 롯데멤버스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기반으로 결제 서비스 사업을 논의해왔지만 법제화가 늦어지면서 기술검증(PoC)을 잠정 중단한 상태다. 소매용 스테이블코인에 관심이 많은 핀테크 업체들 역시 다양한 사업 파트너와 협의를 진행해왔으나 정작 발은 떼지 못하고 있다. 가상화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개월째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이라며 “국내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를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고 전했다.
블록체인 투자사 해시드의 싱크탱크해시드오픈리서치(HOR)는 이날 발간한 ‘디지털 G2를 향한 결단과 실행전략’ 보고서를 통해 현재 한국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로 ‘디지털 엑소더스’를 지목했다. HOR은 “불확실한 규제 환경으로 국내 유망 스타트업들이 싱가포르·홍콩·두바이 등 해외로 떠나면서 한국의 디지털 주권이 약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