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모두 우리 아이다

2025-02-11

세르비아·몬테네그로·슬로베니아·북마케도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코소보는 과거에 한 나라였다. 1945~92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앞서 1912~45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불렸다. 유고 왕국의 마지막 왕 페타르 2세는 1941년 나치 독일이 침공하자 영국으로 도망쳐 런던 클라리지스 호텔에 망명 왕국을 세웠다. 1945년 여름, 영국 정부는 이 호텔 스위트룸을 딱 하루 유고 영토로 선포했다. 그날 그곳에서 알렉산다르 왕세자가 태어났다.

미등록 이주 아동도 사실상 국민

프로축구 홈그로운 제도 참고해

근본적 구제대책 마련 서둘러야

나치 독일 패망 후 집권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 종신 대통령은 왕정을 폐지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 2년 뒤 티토는 왕가의 재산을 몰수하고 국적을 박탈했다. 1970년 페타르 2세가 별세한 뒤 알렉산다르 왕세자 별칭은 ‘왕’이 아닌 ‘왕가의 수장’ ‘왕위 요구자’로 바뀌었다. 2001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정부는 영국 여권을 쓰던 그의 국적을 회복시켰다. 하지만 2006년 그 나라마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나라로 갈렸다. 영국 땅에서 태어나 영어를 모국어처럼 썼고, 영국식 교육을 받았으며 영국군으로도 복무했던 그는 현재 세르비아에 살며 입헌군주제 실시를 요구한다.

알렉산다르 왕세자 사연을 접한 건 영국 역사학자 수바드라 다스의 책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을 통해서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랐고 스스로 영국인이라 생각하는, 그런데 부모는 인도 출신인 다스는 이 책에서 국가와 국민의 본질, 그 둘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누군가가) 어디를 갈 수 있고 갈 수 없는지, 그리고 어디서 살 수 있고 살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힘을 누가 쥐고 있느냐’고.

한국에 바또 사무엘과 아이작 오세이라는 19살 청년이 있다. 코트디부아르 국적인 사무엘의 아버지는 공연차 방한했다가 자국에 내전이 터져 돌아가지 못했다. 사무엘은 2006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축구를 주름잡던 그는 오산중에 진학한 뒤 코치 눈에 띄어 축구부에 들었다. 1학년 때 연습경기에서 2학년 선배들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오산고 시절엔 전국대회 우승도 이끌었다. 좋아하는 선수를 물으면 손흥민과 코트디부아르 출신 디디에 드로그바 사이에서 고민한다. 한편 2005년 가나에서 태어난 오세이는 5살이던 2010년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이주해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살았다. 유소년팀에서 축구를 배우던 친형을 따라 공을 차기 시작했다. 신흥중에 다니던 2019년 경기도 권역 주말 리그에서 18경기 32골로 큰 화제를 모았다. 수원 계명고에서 계속 축구를 한 그는 늘 “한국이 내 고향”이라고, “가슴에 당당하게 태극마크를 달고 싶다”고 말한다. 사무엘은 불어보다 한국말이, 오세이도 영어보다 한국말이 편하다.

제 또래 한국 청년과 다를 게 없다. 같은 급식을 먹었고, 같은 선생님한테 같은 걸 배웠다. 같은 말을 하고 사고방식도 비슷하다. 그런데도 사무엘과 오세이는 국적법상 한국 국민이 아니다. 우리 국적법은 혈통주의를 따른다. 사무엘은 코트디부아르, 오세이는 가나 여권을 쓴다. 프로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선, 어제까지 같은 팀에서 함께 뛰고 뒹굴었던 친구들과는 달리 외국인 선수 제도에 따라야 했다. 적어도 지난해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다르다. 프로축구 K리그가 ‘홈그로운(home-grown) 제도’를 도입했다. 18살까지 국내 등록팀에서 5년 이상 또는 연속 3년 이상 뛴 외국 국적 선수를 국내 선수와 똑같이 대우하는 제도다. 이 제도의 첫 수혜자가 사무엘과 오세이다. 사무엘은 FC서울과, 오세이는 대구FC와 각각 계약했다. 두 선수는 나란히 영플레이어상(옛 신인상) 수상을 꿈꾼다. 경력이 꽤 있어야 K리그에 올 수 있던 이른바 외국인 ‘용병’ 선수가 아니라, 이 땅에서 자라난 ‘홈그로운 선수’이기에 꿈꿀 수 있는 일이다.

지난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국내 장기체류 미등록 이주아동의 강제퇴거를 중단하고 체류 자격 심사제도를 마련하라고 법무부에 권고했다. 미등록 이주아동은 한국에서 살겠다고 스스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사실상 한국의 생활 환경과 방식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해 갈 곳도 막연하다. 그런 그들을 내치는 건 옳지 않다. 인권위 권고에 따라 2021년 법무부가 내놓았던 한시적 구제대책이 다음 달 말 끝난다. 지난 4년간 많은 아동이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아동이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더 늦기 전에, 이왕이면 더 근본적인 구제대책을 마련하기 바란다. 미등록 이주아동 누구나 사무엘과 오세이처럼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그들 모두 우리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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