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핌] 최원진 기자= 현대차·LG 등을 비롯한 한국 기업들이 미국 내 수십억 달러 규모의 첨단 제조시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비자를 활용해 근로자를 파견해왔다고 인정하면서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국 내 한국 기업 관계자들은 FT에 자사 직원과 하청업체 직원들이 B-1 비자나 전자여행허가제(ESTA)를 통해 단기 체류 자격으로 현장에 투입돼 왔다고 밝혔다.
B-1 비자는 비즈니스 목적 입국만 허용할 뿐 대가를 받는 근로는 금지돼 있고, ESTA 역시 관광·출장 성격의 단기 방문에 국한돼 있어 건설 현장에서의 상시 노동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럼에도 미국 내 사정을 잘 아는 복수의 인사들은 이 같은 관행이 "공공연한 비밀(open secret)"이었다고 전했다. 미국 정부가 수십억 달러 투자를 요구하면서도 공사를 제때 끝낼 수 있는 단기 근로비자를 내주지 않아 기업들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내몰렸다는 지적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2012년 발효됐지만, 싱가포르·캐나다·호주처럼 특정 국가 전용 근로비자 제도가 없다. 한국 정부는 20년 넘게 이를 요구했지만, 미 의회 승인 필요성에 가로막혀 번번이 좌절돼 왔다.
이 문제는 조 바이든 전 행정부 들어 더욱 부각됐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보조금과 주·카운티 차원의 인센티브에 힘입어 한국 기업들이 반도체·배터리·전기차 공장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지만, 비자 문제 제기에 대해 미국 정부는 "미국인을 고용하라"는 원칙적 답변만 내놨다는 것이다.
조너선 클리브 인트라링크 한국 대표는 "실제로는 미국 당국, 특히 조지아주가 단기 공사에 한국 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실상 눈감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보조금을 받은 기업들은 일정과 고용 조건을 맞추지 못하면 보조금을 환수당할 수 있어 편법 사용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엘러벨 공사에 참여한 한 기업 관계자 역시 "새 장비 설치와 프로젝트 감독을 위해서는 한국 인력이 필요하다"며 "완공 뒤에는 현지 인력을 고용할 수 있지만, 미국이 현지 고용을 원한다면 공장이 빨리 완공되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클리브 대표는 또 "한국 기업들의 당면 과제는 고급 엔지니어가 아니라 건설 노동자 부족"이라며 "공장을 신속히 지어야 하는데, 미국은 심각한 인력난 탓에 인력이 쉽게 이탈한다"고 지적했다.
한 주요 산업단체 임원은 "재계와 한국 정부, 외교 당국 모두 이 문제가 오래전부터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며 "다른 미국 내 한국 공장들도 같은 관행을 따르고 있어 ICE가 추가 단속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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