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 연대' 자신감 얻은 김정은 다음 행보는…깊어지는 '페이스메이커' 고민

2025-09-04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서는 모습을 국제사회에 연출하면서 '몸값'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향후 이를 토대로 핵 능력 고도화에 몰두하며 러시아로부터는 군사적 지원, 중국으로부터는 경제적 지원을 받아 외교적 활로를 모색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번 방중에서 김정은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자신의 다자무대 데뷔전에 대한 주목도를 높였다. 베이징 역에 도착한 지난 2일에는 아무런 공식 일정을 소화하지 않았지만, 딸 주애를 대동한 사실만으로도 극적 효과를 누렸다. 중국은 서열 5위이자 시진핑의 평가받는 차이치(蔡奇)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그를 맞이하며 예우를 갖췄다.

3일 오전에는 천안문 망루에 시진핑, 푸틴과 함께 올라 열병식을 지켜봤다. 특별한 발언이나 퍼포먼스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법적 핵 개발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던 불량 국가의 지도자가 합법적 핵보유국인 중국·러시아 정상과 나란히 선 건 그 자체로 상징성이 컸다. 북·중·러가 반미연대의 구심점이 되겠다는 선언을 한 셈인데, 동시에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듯한 이미지도 연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향후 대북 제재가 무력화할 것이라는 징조로도 볼 수 있다.

리셉션 오찬에서도 그는 시진핑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 옆자리에 앉는 등 중국은 그에게 푸틴 다음으로 격을 갖춘 의전을 제공했다. 오찬 뒤 김정은은 곧바로 푸틴과 양자 회담을 했다. 이들은 파병과 관련해 덕담을 주고받으며 불법적 군사협력을 정당화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김정은은 4일 오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주중 북한 대사관에만 머물렀다. 이번 방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북·중 정상회담은 이날 오후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 정상회담이 열리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껄끄러웠던 양국 간 혈맹의 완전한 복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정은은 중국과 러시아의 지지라는 ‘고가치 외교 자산’을 토대로 보다 과감한 대내외적 행보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당장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80주년, 이른바 '쌍십절' 행사에 중국과 러시아가 고위급 인사를 파견할 가능성이 있다. 시진핑의 파격 방북도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김정은의 러시아 답방도 가시권에 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푸틴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정은에게 “회담할 준비가 됐다면 모스크바로 오라”고 제안했다고 러시아 타스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에 따라 김정은이 사상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앞서 김정은은 20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 9월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푸틴과 만났지만 모스크바에 간 적은 없다.

핵 능력 고도화 측면에서는 북한이 최적기를 맞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은 사실상 시진핑과 푸틴의 암묵적 승인을 받았다고 인식하고 핵물질 생산에 박차를 가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로부터 파병 대가로 미진했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관련 기술이나 핵잠수함 기술 등을 획득하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김정은은 당분간은 대남 단절 및 대미 적대 기조를 이어가며 대화 재개 시기를 저울질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과 러시아를 뒷배로 삼은 만큼 비핵화 협상 거부 의사를 더욱 명확히 하고, 군축 협상을 띄우며 국제사회로부터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는 데 우선순위를 둘 전망이다.

더 나아가 중국 전승절 무대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는 딸을 대동한 것은 세대를 넘어 중국·러시아와 혈맹 관계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행보로 풀이된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군사적 상징이 응축된 다자외교 무대에 딸을 세움으로써 김정은은 북한 체제가 영속적임을 과시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에 북한이 단기적 협력 상대가 아니라 세대 간 지속 가능한 동맹임을 강조하려 했다”며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의 시선을 끌고 내부 불안을 잠재우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분석했다.

이는 곧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이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달 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페이스메이커론’을 띄운 이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으로부터 대북 관여 의지를 확인하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북·중·러가 반미연대의 선두그룹으로 치고 나오면서 북·미 관계 개선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끌어내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구상에도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김정은의 핵 보유 인정 의지가 더욱 강해진 데다 트럼프의 ‘러브콜’을 무시하고 베이징으로 달려가 시진핑, 푸틴과 ‘반미 모의’에 가담한 건 당분간 남·북·미 간 대화 재개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은 3일 “특별한 평가는 없다”, “예의주시하고 면밀히 살피고 있다”는 원론적 반응으로 말을 아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시진핑의 메시지, 김정은·푸틴의 동선과 발언, 열병식 연출의 의도를 촘촘히 복기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통일부 당국자는 4일 “북·중·러 정상이 나란히 선 장면으로부터 앞으로 반미 연대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이 중·러와 돈독해진 관계를 바탕으로 미국과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상반된 의견이 존재한다”며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일각에서는 김정은이 다자외교 무대에 나선 것은 대외적 관여라는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향후 한·미·일 대 북·중·러 간 대결 구도가 굳어지는 건 한국에 외교적 부담으로 작용할 우려가 크다. 이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안미경중 시대의 종언을 고한 가운데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공간은 더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이 대통령은 23일부터 뉴욕에서 열리는 제80차 유엔총회에 참석한다. 트럼프와의 만남이나 한·미·일 정상 간 회동이 이뤄질 수 있다.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는 미·중·일 정상이 모두 참석할 가능성이 큰 가운데 주최국으로서 한국의 전략적 포지셔닝이 더 중요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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