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전 오늘, 1989년 2월 5일 베를린 장벽에서 마지막 사살 희생자가 발생했다. 크리스 귀프로이(Chris Gueffroy), 당시 20세.
동베를린 식당에서 일하는 한편 체조 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네 가지 꿈이 있었다. 체조 세계 챔피언, 자유로운 삶, 미국 여행 그리고 그 실행을 위한 서독으로의 탈출이었다.
기회를 노리던 그에게 결단이 재촉되었다. 군 입대 통지서가 날아온 것이다.
절망 속에 희망이 보였다. 베를린 장벽에서 경비대원으로 복무 중인 친구가 스웨덴 총리의 동독 국빈 방문 시기에 탈출자에 대한 발포 명령이 중단된다는 정보를 전한 것이다. 사실은 아니었다.
탈출 결행에는 절친 크리스티안 가우디안(Christian Gaudian)도 함께하기로 했다. 동서 베를린을 관통하여 흐르는 브리처 운하를 타고 서쪽으로 향한 둘은 서베를린 노이쾰른구 강변에 세워진 금속 울타리 장벽을 넘기 직전에 발각되었다.
총탄이 쏟아지고 거꾸러진 귀프로이는 부상을 입은 친구 앞에서 곧 숨을 거두었다. 총알 하나가 심장을 관통했다. 그의 죽음은 처형에 가까웠다. 경비대원이 4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조준 사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가우디안도 쓰러졌지만 잡히기 직전 자신의 신분증을 담 넘어 서쪽으로 던졌다. 그의 이름과 자유로의 투쟁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은 베를린 장벽을 기습적으로 세웠다. 이를 시작으로 동서독 전 접경선에서의 통행을 완전히 차단하고, 장벽과 통제시설을 구축했다.
대외적 명분은 동독의 안전 보호였지만, 실제는 서독/서베를린으로의 동독 주민 탈출 방지였다. 1949년 동서독 정부가 따로 수립된 후 동독에서 자유를 향한 서독/서베를린으로 이주자/탈주자가 그때까지 당시 동독 인구의 1/6인 270만 명에 달했다.
장벽 건설 직후 10월 6일 동독 국방성은 극비로 동독 국경선의 불가침성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키고 동독 주권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총기 사용을 허가한다는 사살명령서를 내렸다. “독일민주공화국을 탈출하는 자를 말살(vernichten)하는 것이 국경경비대의 의무”라 명시했다. 동독은 이 명령서의 존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귀프로이와 가우디안의 투쟁은 헛되지 않았다. 서방 언론은 동독 정권의 반인권적·비인도적 행태를 맹비난했고,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던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도 동독에 변화를 요구했다. 서방 세계 역시 동독도 가담한 ‘헬싱키 최종 협정’(1975)에 명시된 여행의 자유, 인권 보장을 동독에 압박했다. 동독 내부적으로도 주민들의 체제 변화 목소리가 점증하자 동독은 변화의 모습으로 분칠할 수밖에 없었다.
4월 동독은 사살 명령을 비공식적으로 해제했다. 공식적으로 해제된 것은 12월 21일, 즉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6주 후였다.
구금된 가우디안은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서독 정부가 움직였다.
동독 주민도 독일 민족이자 서독 국민임을 포기하지 않았던 서독은 동독과 협상해 대가를 지불하고 1989년 10월 17일 그를 서독으로 데려와 자유롭게 했다. ‘정치범 석방 거래’, 이른바 ‘자유 거래(프라이카우프, Freikauf)’였다.
3주 뒤 통한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해 1월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가 베를린 장벽이 100년은 더 서 있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었다.
동독의 갖은 통제와 사살에도 자유를 향한 동독 주민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에서만 구축 11일 만에 최초의 희생자가 나온 후 최소 136명, 최대 445명이 살해되었고, 7만 1천여 명이 투옥되었다.
2003년 6월 21일 귀 프로이의 35번째 생일을 맞아 생을 마쳤던 브리츠 둔덕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2010년 8월 13일에는 베를린의 한 거리가 ‘크리스-귀프로이-가(街)’로 명명되었다. 이듬해 “크리스 귀프로이의 짧은 생애(Das kurze Leben des Chris Gueffroy)”란 기록영화가 그에게 헌정되었다.
북한 사회안전성은 북·중 국경봉쇄를 강화하기 위한 포고문 “북부 국경봉쇄 작전에 저해를 주는 행위를 하지 말데 대하여(2020.08.25.)”라는 제목의 포고문을 통해 국경 봉쇄선으로부터 1~2㎞의 완충지대를 설정하고, 완충지대에 무단으로 출입하거나, 도로·철길의 국경 차단물에 접근하거나, 압록강·두만강의 북한 쪽 강변에 침입하면 짐승은 물론이고 사람도 무조건, 예고 없이 사살한다고 못 박았다. 북한으로 오는 사람이 주 표적은 아닐 것이다.
김정은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2020년), ‘청년교양보장법’(2021년), ‘평양문화어보호법’(2023년) 등 이른바 ‘김정은 3대 악법’에 더해 ‘청년동맹’, ‘인민반’, 반사회주의·비사회주의 행위를 철저히 근절하기 위해 국가보위성·사회안전성 요원으로 구성된 특별전담조직 ‘연합지휘부’ 등으로 주민 생활 전반을 다층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그런데도 2023년 11월 26일 실시된 지방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반대표가 나왔다. 보안당국은 주민들 내 체제 전복 혁명 모의가 발생해 이를 처벌했다는 동영상을 만들어 주민들을 사상 교육하고 있다. 지난해 초에는 중국 파견 북한 근로자들이 불만을 폭발해 폭동을 일으켰다.
지금 이 시각, 멀리 이국땅 전쟁터에서 자식들이 헛된 죽음을 이어간다. 1월 27일 노동신문은 남포시 온천군과 자강도 우시군에서 ‘당 지도 간부들’이 ‘집단적으로’ ‘당규률위반행위’, ‘반인민적행위’란 ‘특대사건’을 일으켜 김정은이 직접 나서 엄벌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북한 주민이 눈을 떠가고 있다. 압제와 처형에도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그들이 움직여야 체제 변화도 통일도 가능해진다. 자유가,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그들이 보고 듣고 느껴 스스로 결단해야 하고 하게 해야 한다.
대부분의 이 땅에 온 북한이탈주민이 그쪽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변화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회라고 한다. 그러면 여러분이 여기 계시는 사실이 변화라고 말해준다.
“북한 주민 변화를 통한 북한 변화”,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을 시작한다.
헌법 4조(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를 존중한다면 이 길밖에 없다.
글/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전 통일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