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일 세계 전기차 1위 기업인 중국 비야디(BYD)의 한국 법인을 이끄는 류쉐량 아시아태평양 자동차사업부 총경리가 서울 모빌리티쇼에서 국내 취재진과의 만남을 자처했다. 류 총경리는 서울 모빌리티쇼 전시장 한복판에 현대차·기아와 맞먹는 크기의 부스를 마련한 후 취재진을 만나 “단기 이익이 아닌 지속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면서 “한국에 더 많은 차를 들여와 고객군을 넓힐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류 총경리는 서울모빌리티쇼에서 BYD가 7월 한국에 선보일 전기차(EV) 세단 ‘씰’을 직접 공개하고 전기차 SUV ‘씨라이언’의 국내 출시 계획도 밝혔다. 실제로 BYD의 진격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올 1월 첫 출시된 아토3는 지난달 출고되자마자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 단일 모델 기준 판매 1위(단일 모델 기준)에 등극했다.
BYD의 자신감은 무엇일까. 자동차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전기차가 아닌 소프트웨어,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른바 ‘신의 눈(天神之眼)’ 프로젝트다. 올 2월 왕촨푸 BYD 회장은 전 차종에 자율주행 시스템인 ‘신의 눈’을 무료 탑재해 ‘자율주행 시대’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업계에 따르면 BYD가 전 차종에 자율주행 기술을 배포하면서 데이터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BYD의 주행 데이터는 2024년 하루 7200만 ㎞가 쌓였는데 올해는 축적량이 1억 5000만 ㎞로 두 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데이터가 쌓일 수록 자율주행 기술은 빠르게 진화한다.
왕 회장은 3월 운전자가 개입하는 조건에서 고속도로와 도심 자율주행을 수행하는 레벨3의 자율주행 상용화에 대해 “2~3년이면 된다”고 자신했다. BYD는 이미 중국에서 레벨3 자율주행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다. 업계는 BYD가 늦어도 2027년이면 사실상 레벨3인 자율주행 ‘레벨2++’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을 국내 출시하는 전기차에 탑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 BYD가 테슬라에 이어 국내 전기차 시장의 판도를 뒤바꿀 다크호스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BYD가 자율주행 기술을 앞세워 한국 시장에 전기차를 쏟아내면 현대차·기아는 더욱 치열한 경쟁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다. 현대차·기아는 내연기관을 합친 국내 시장 점유율이 80%를 넘는다. 하지만 전기차 시장에서는 위상이 다르다. 지난해 기준 내수 시장에서 현대차·기아의 전기차 점유율은 약 40%에 그친다.
반면 압도적인 운전자 보조 기능인 오토파일럿을 앞세운 미국 테슬라가 약 2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테슬라 모델Y가 국내 전기차 시장 판매 1위를 달렸다. 업계는 테슬라의 완전자율주행(FSD) 기술이 국내에 도입되면 시장 점유율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대차·기아는 전기차 판매 부진으로 최근 울산 공장의 전기차 라인 일부를 일시적으로 멈춰 세울 만큼 고전을 거듭하는 상황이다. 2026년 투입될 테슬라의 FSD도 부담스러운데 2027년에는 BYD까지 레벨3에 가까운 자율주행 기능을 탑재한 차를 선보이면 현대차·기아는 상당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현대차·기아가 규제의 늪에 빠져 경쟁의 무기가 될 레벨3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 도입이 쉽지 않다는 측면이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가 테슬라나 BYD처럼 국내에 판매되는 차량에 자율주행칩과 센서를 장착해 데이터를 모아야 자율주행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국내에서 자율주행 시범 운행 사업마저 중단하는 실정이다. 현대차는 2022년 강남에서 자율주행차 ‘로보라이더’를 운행했지만 이듬해 철수를 결정했다. 또 현대차그룹 산하 포디투닷은 2022년부터 서울 청계천 일대에 운행하던 자율주행셔틀 운행을 지난해 말을 끝으로 중단했다. 업계 고위 관계자는 현대차가 국내 자율주행 사업에서 철수하는 상황에 대해 “정해진 구간만 다니는 운행에서 질 좋은 데이터가 쌓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자율주행 기술을 고도화하려면 출퇴근 시간과 같은 복잡한 도심 교통 환경, 악천후 등의 주행 데이터가 중요하다. 하지만 보슬비만 내려도 운행 중단을 권고하는 상암 자율주행 시범운행지구의 사정에서 국내에선 자율주행 데이터와 기술을 고도화하기는 매우 어렵다.
특히 자율주행 중 사고가 발생할 경우 책임이 불분명해 기업이 적극적인 도전에 나설 수 없는 것이 최대 장애물로 꼽힌다. 미국과 독일·일본 등은 자율주행차를 운행하는 사람은 물론 AI 운전자의 책임과 면책 규정까지 정비해 놓고 있다. 하지만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만들겠다고 한 자율주행차 사고 조사 처리 지침을 여전히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할 민형사상의 문제를 예측할 수 있는 법제를 당국에서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기업은 망설이고 정부는 뒷짐을 지는 사이 이미 기업 경쟁력은 뒤지고 있다. 현대차는 레벨3 수준의 SDV를 2028년에 내놓는다. 테슬라보다는 3년, BYD보다는 1~2년 늦다. 현대차가 양산할 차의 자율주행 기술이 BYD보다 뒤지면 전기차 시장에서의 위상은 더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청계천에서 자율주행차를 운행하다 철수한 포디투닷에 무엇을 얻었느냐고 물어보니 ‘얻은 것은 없다’는 답을 했다”며 “2년 전에 운행하던 자율주행차를 타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최대 80% 이상 개입하고 기술적으로 무엇이 발전했는지 알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