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친(親)가상자산 정책에 국내 거래소에서 미국 달러를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이 폭증하고 있다. 업비트와 빗썸 등 국내 거래소 회원이 1600만 명을 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법적·제도적 공백 상태에 놓여 있어 디지털 결제 산업과 원화 경쟁력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서울경제신문이 시장 분석 업체 크립토퀀트에 의뢰해 5대 가상자산거래소(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고팍스)에 상장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와 유에스디코인(USDC)의 국내 거래량을 분석한 결과 올 1월부터 이달 28일까지 거래 규모가 60조 1019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증가분의 약 97%는 테더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8배 많았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같은 법정화폐와 1대1로 가치를 고정한 가상자산이다. 시장에서는 △미국의 달러 지배력 강화 △해외 거래소로 자금 이전 △환전 등 거래 비용 최소화의 이유로 스테이블코인 수요가 급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달러코인 확산땐 금융주권 흔들…'원화 스테이블코인' 서둘러야

국내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 거래가 급증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스테이블코인을 달러 패권 강화의 수단으로 삼겠다고 밝히면서 투자자들의 신뢰가 높아졌다. 달러 투자 수단으로 스테이블코인이 이용되기도 한다. 상당수 투자자들은 해외 거래소나 개인 지갑으로 자금을 옮기기 위해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쓴다. 대부분의 거래소가 스테이블코인을 취급하고 있고 추가 환전 과정이 필요하지 않아 거래가 편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김동혁 디스프레드 연구원은 30일 “달러 투자와 블록체인 거래에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기 위한 수요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국내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제도가 미미하다 보니 투자 자금의 ‘탈한국’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가상자산 사업자의 해외 거래소 이전 금액은 지난해 상반기 74조 8000억 원으로 전기 대비 96.3%나 폭증했다. 주웅 포필러스 프로덕트 매니저는 “더 다양한 투자 기회가 있는 해외 거래소로 국내자금 유출이 지속하고 있다”며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자금 이탈 경로를 하나로 해주는 측면이 있으며 글로벌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면 원화 통제력의 약화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무역 거래에서 스테이블코인으로 거래를 하고 개인 명의로 국내 거래소에서 스테이블코인을 판매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글로벌 시장만 봐도 스테이블코인은 급성장하고 있다. 미국 자산운용사 아크인베스트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거래액은 15조 6000억 달러(약 2경 2948조 원)로 전년 대비 두 배 이상 급증했다. 이는 비자와 마스터카드 연간 거래량의 각각 119%, 200%에 달한다.

해외 주요국들은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올 1월 취임 직후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를 금지하고 스테이블코인을 추진하는 내용이 담긴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달 14일에는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인 ‘지니어스법안(GENIUS Act)’이 통과됐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말부터 가상자산법(MiCA)을 시행했으며 영국 역시 영국중앙은행과 금융감독청(FCA)이 함께 스테이블코인 규제 체계를 마련 중이다. 싱가포르와 홍콩도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원화 스테이블 코인 뒤쳐지면…글로벌 결제 거래 흐름 발 못맞출 수도
전문가들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유통 체계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활성화해야 전 세계 차원에서 이뤄지는 규제 논의에 참여할 수 있고 핀테크와 P2P, 카드, 송금 등 관련 금융 산업 육성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대표적인 결제 수단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신용카드는 수수료가 0.5~2.3% 수준으로 결제는 즉시 이뤄진다. 국제송금은 수십 달러의 수수료와 2~3영업일이 필요하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10원 이하의 수수료로 수초에서 수분이면 결제가 이뤄진다. 황효준 쟁글 연구원은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결제·거래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임에도 국내에서는 규제 미비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수요가 쏠리는 상황”이라며 “USDT를 발행하는 테더의 경우 지난해 순이익이 14조 원을 넘을 정도로 성장한 만큼 국내에서도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비롯해 다양한 서비스가 나올 수 있도록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원화 국제화를 위해서라도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하다는 말도 있다. 현재 달러를 기반으로 하는 스테이블코인 비중은 약 98.97%로 금(0.62%)과 유로(0.32%) 등에 비하면 절대적이다. 하지만 디지털 금융시대로의 전환을 고려하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지금보다 원화를 국제화하는 핵심 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 기획재정부 1차관을 지낸 김용범 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는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시대의 페트로 달러”라며 “한국의 원화 경쟁력이 다른 화폐와 비교해 뒤떨어지지 않는 만큼 미국식 전략적 유연성과 민간 주도의 확산력을 참고해 (스테이블코인에서)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