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비정규직 등 열악한 방송노동 환경의 문제를 고발하며 세상을 떠난 故이한빛 PD.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이후 그가 꿈꿨던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故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씨는 아들을 기억하며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를 펴냈다. 이후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함께하며 인터뷰집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 ‘이태원으로 연결합니다’를 펴냈다. 그는 글을 쓰며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세상에 조금씩 문을 열고 아픔을 치유했다.
8일 의정부 신곡1동 성당에서 인권 강연에 나선 故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씨를 만났다.
Q.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를 어떻게 펴내게 됐나
A. 한빛이 떠난 다음에 모든 것이 수습이 안 되더라. 인정도 안 되고 감정 수습이 안 되고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성당에 가서 매일 기도하고 일기를 썼다. 한빛과의 기억을 되새기며 기억나는 것마다 일기를 써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홈페이지에 매일 올렸다.
무언가를 쓰고 기억해내다 보니 마음이 많이 위로가 되고 정리가 됐다. 그래서 이 기록한다는 것이 큰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게 됐고 치유가 됐다. 이런 기록이 쌓이니 출판사 쪽에서 제안이 와 50편 정도 추리고 새로 글을 붙여 2021년도에 책을 내게 됐다.
Q. 그 이후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만나면서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등 인터뷰집도 펴냈다. 어떤 심정이었나
A. 이태원 참사 기록단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그것을 모집한다는 것 보고 잠깐 망설였다. 유가족을 인터뷰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내가 유가족인데 유가족을 인터뷰하면서 그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 무섭고 싫었다. 또 내가 굳이 그걸 끌어내서 왜 울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망설였다.
그 때 이한열 열사 어머니께서 광주 망월동 묘지 참배객들을 보며 ‘나도 구경하고 싶다’고 말한 걸 떠올렸다. 당시 활동가들, 자원봉사자들,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러 왔었는데 이한열 열사 어머니는 그걸 보고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참배를 하고 싶다. 아들만 살아 돌아온다면...’ 그런 심정인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세월호 참사 유가족 예은이 아빠는 그 말뜻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위로하는데, 그 아버지는 하늘을 쳐다보고 울었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유가족은 그런 것 같다. 활동가들도 그렇고 작가들, 인터뷰 하는 사람, 심리 상담가도 아픔에 공감한다. 그러나 유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미묘한 간극이 있는 것 같다. 유가족만이 알 수 있는 미묘한 이 간극을 표현해서 유가족들의 마음을 더 많이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기록단에 지원했고 연수를 받았다.
청주에 사는 지현이 엄마를 인터뷰해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라는 책을 내게 됐다. 용산FM이라는 방송국에서는 이태원 희생자들이 아닌 지역 주민들을 인터뷰 했다. 나도 거기에 참여해 윤보영이라는 청년을 인터뷰해 ‘이태원으로 연결합니다’를 출판했다.
유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간극, 유가족들은 사는 게 아니고 버티거나 견디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유가족은 변덕이 심하고 마음이 휘몰아치는 것이 당연한 거다. 하루에 불쑥불쑥 무너지는 건 당연한 거다. 이걸 말하고 싶었다.
Q. 책을 내는 것 외에도 사회 활동가로도 활동하고 계시다. 교사에서 달라진 일상들이 어떤가
A. 교사를 되게 좋아했었다. 천직으로 생각했고 학교가 너무 행복했다. 공부하는 게 좋았고 아이들도 좋았고 국어가 정말 좋았다. 막상 한빛이 죽고 나니 제가 다른 세계에 들어오게 됐다. 제가 주로 참석하는 곳이 소외된 곳, 약자가 있는 곳, 산업재해 현장, 이태원 참사처럼 그 현장에서 유가족을 만나는 것이다 보니 학교에서 느꼈던 아이들의 순수함 같은 것이 사라졌다. 지금은 교사를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이쪽 생활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왔다.
오늘 인권 주일 강연을 했는데 제자들을 만났다. 올해 벌써 환갑이 된 제자가 환갑 기념이라고 받은 100만 원을 기부금으로 냈다. 만류했는데 선생님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서 기부했다. 어떤 제자는 울면서 저를 아들 한빛이라고 생각하고 안아달라고 했다. 놀랍고 고맙다.
한빛이 남겼던 말 중에서 ‘연두빛’이라는 말이 있다. ‘연대의 두근거림으로, 빛나는’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한빛이 살아가고 싶었던 날들, 제가 살고 싶은 날들을 이어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빛의 생각을 가지고 죽는 날가지 저보다 더 소외되고 약자고 제 손이 필요한 곳에 가서 연대하고 싶다. 제가 힘이 된다면 부축하고 싶다. 제가 힘을 받았으니까 자식이 죽어도 8년 동안 살아있는 것 같다. 이걸 잊으면 안 될 것 같다.
Q. 故이한빛 PD의 죽음 이후에도 사회적 참사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참사들을 어떻게 보는가
A.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구 지하철 참사, 삼풍 백화점 참사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10년 전에 있었다. 이렇게 사고가 계속되는 건 생명 안전 의식이 너무 많이 떨어진 것이다.
나는 한빛이 죽을 줄 몰랐다. 무난하게 살 줄 알았다. 많은 사람들이 참사가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 문제라고 생각해야 한다.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사태가 오지 않도록 우리는 한 마음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나에게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걸로 생각을 하면 참사 해결도 빨리 되고 유가족도 힘을 받을 수 있다. 손 한번 잡아주면 살아나는 것처럼.
Q. 故이한빛 PD의 죽음 이후에 미디어업계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만들어졌다.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A. 사람이 죽어서 사회가 변화하는 건 슬픈 현실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 모든 것이 상식적으로 공정하게 돌아가야 된다. 방송업계에서 22시간씩 노동을 하고 찜질방에서 대기하며 잠자고 초과 근무 인정이 안 되는 현실에 놀랐다. 한빛이 죽고 나서 많이 달라지고 노동 시간도 단축되고 함부로 욕도 안하고 배려한다는 것, 엔딩 크레딧에 우리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 이것이 달라진 점이다.
그렇게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방송은 어렵다. 2024년에 임금체불이 발생한다는 것도 한빛 미디어 센터에 다 들어온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방식으로 해결하면 안 된다. 각자 알아서 많은 비정규직들이 알아서 개척하라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Q.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
A. 김혜영이 아닌 ‘한빛 엄마’로 살고 싶다. 한빛이 남긴 ‘연두빛’을 실천하면서 끝까지 소외된 약자들에게 끝없이 손을 내밀면서 손을 잡아주고 싶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하겠다.
한빛센터가 잘 되면 두 가지다. 방송계의 많은 비정규직이 살아날 수 있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 또 그것이 잘 되면 다른 청년들도 희망을 갖고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 다 연결 돼 있다. 그게 제 꿈이다.
[ 경기신문 = 고륜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