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짠데 수입차 타고다녀"…쿠팡에만 있는 '잡레벨' 실체

2025-01-16

쿠팡의 인사채용 총괄이사 진규언(39)씨는 입사 8년 만에 사원에서 임원급으로 ‘로켓 승진’했다. 대학에서 세무ㆍ회계를 전공한 그는 쿠팡 합류 전 대기업 영업직과 헤드헌팅 회사를 거쳤다. 인사 업무는 2016년 쿠팡에 입사하면서 시작했다. 테크, 리테일, 물류 자동화 기술 등 관련 분야 현장의 인재를 발굴해 쿠팡으로 끌어 모았다. 그가 쿠팡 입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직원만 1000명이 넘는다. 진씨는 “쿠팡에선 스스로 프로젝트를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무한하게 주어진다”면서 “근속 연수나 전공, 경력 등과 무관하게 고객 만족의 성과를 입증하면 승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쿠팡에서 진씨와 같은 30대 리더나 임원 발탁은 ‘파격’이 아니다. 단기간에 승진을 거듭한 이들이 적지 않다. 입사할 때는 낮은 직급이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상급자를 추월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도 ‘‘후배 밑에서도 일할 수 있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 필요가 없고, ‘승진에서 밀려서 어쩌냐’고 위로하는 분위기도 없다. 말 그대로 ‘성과주의’에 충실한 인사 원칙에 쿠팡 직원들은 익숙해 있다.

쿠팡은 규모로 따지면 대기업이다. 2021년 처음 공시 대상 대기업집단에 지정됐으며, 자산 총액 기준 재계 27위(2024년)로 몸집이 커졌다. 하지만 쿠팡 고위관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대기업이 아니다”며 손사래를 친다. 겸손일까, 엄살일까.

쿠팡의 전직 임원은 “쿠팡은 물류와 유통 분야에서 쟁쟁한 대기업과 경쟁해야 하고 집중적인 견제를 받고 있다”면서 “후발주자인 쿠팡이 다른 대기업과 같은 기득권임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얻을 게 없다.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공급가 협상에서 쿠팡이 큰 목소리 낼 입장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스타트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대기업이길 거부하는 쿠팡. 이 애매한 정체성은 쿠팡의 조직문화에도 투영돼 있다. 직급과 상관없이 주도적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문화나 정밀한 평가를 거쳐 보상하는 방식은 스타트업답다. 하지만 조직이 비대해지고 상장 기업이 되면서 스타트업처럼 도전과 실패를 반복할 수만도 없는 처지다. 쿠팡 성장의 연료, 특유의 조직문화는 계속될 수 있을까.

‘박 과장’도, ‘공채 동기’도 없다

쿠팡은 일반적인 사원-대리-차장-부장 등과는 다른 직급 체계를 갖고 있다. 아마존을 철저히 참고해 만든 잡 레벨(Job level) 방식을 쓴다. 1~12까지 부여되는 잡 레벨은 숫자가 클수록 직급도 높다. 레벨 7이면 한국 기업에서 임원 직전 단계인 이사급으로 본다. 미국 회사답게 호칭은 직급과 관계없이 영어 닉네임으로 부르는 게 원칙. 창업자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의 닉네임은 그의 영어 이름인 ‘범(Bom)’이다.

잡 레벨이 높다고 꼭 높은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팀장 보다 팀원의 잡 레벨이 높은 경우도 있다. 다른 기업에서 연공서열에 익숙하다가 쿠팡에 이직한 사람들이 처음에 가장 의아하게 느끼는 부분이라고 한다.

대기업 출신의 현직 쿠팡 직원 A씨는 “처음 회의를 할 때, 누가 팀장이고 누가 팀원인지 헷갈릴 정도로 혼란스러웠다”면서도 “경험해 보니 이런 문화가 문제 해결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잡 레벨은 성과에 대한 보상일 뿐, 권위나 힘의 크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회의에서 만나는 직원들은 서로의 잡 레벨을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e메일이나 화상 미팅, 단체 대화방에서 다양한 직무의 직원들이 회의할 때는 영어 이름과 담당 업무만 공유할 뿐이다. 상대의 잡 레벨을 알아내는 일은 가능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려고 들지 않는다.

쿠팡은 고용인원 8만명이 넘는 회사지만, 창사 이래 신입사원 공개채용을 한 적이 없다. 필요한 사람을 수시로 뽑는다. 쿠팡 채용 사이트는 29일 현재 688 포지션, 15 오피스가 채용 중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이러니 입사 동기나 선배, 후배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 빨리 들어왔다고 잡 레벨이 높은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자주 들고나니 파벌주의가 뿌리 내리기도 어렵다. 쿠팡의 전직 임원은 “쿠팡은 전무가 대리처럼 일하는 곳”이라면서 “직급이 높을수록 성과를 증명해야 하고 상명하복 문화가 없다. 눈치를 보거나 줄을 설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애자일로 작동하는 쿠팡

쿠팡은 국내에서 애자일(Agile) 조직 운영을 가장 일찍 시작한 회사 중 하나다. 애자일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확산한 조직운영 방식이다. 본래 IT 개발자 간 협업을 바탕으로 상황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소프트웨어(SW) 개발 방법론에서 유래했다. 부서 간 칸막이를 없애고 프로젝트에 따라 직원들이 헤쳐 모이며 협업하는 구조다.

애자일의 핵심은 독립적인 사업 조직 리더를 일컫는 PO(프로덕트 오너)와 PM(프로덕트 매니저)이다. 이들은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등을 모아 팀을 구성해 업무를 이끄는 ‘미니 CEO’다. 부서장이나 팀장 같은 평가 권한은 없고 사업을 기획하는 업무를 이끈다. 쿠팡은 2014년부터 PO를 채용해왔으며, 2022년부터는 PO와 PM 직무를 모두 두고 있다. 쿠팡 관계자는 “PO가 프로덕트를 어떤 전략으로 만들지 기획하는 업무를 한다면, PM은 유관 부서와 타임라인을 맞춰 조율해가며 실제로 서비스를 고객에게 전달하는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10년 가까이 쿠팡에서 일했던 전 직원은 “일반적인 회사에서 ‘보고서. ver1, 2, 3…’같은 식으로 파일명이 만들어지지만, 쿠팡에서는 불가능하다. 개개인의 하드디스크가 아닌 공유 폴더에서, 공유 시트와 대시보드를 통해 업무가 실시간 공유되기 때문이다”라고 기억했다. 쿠팡에서는 누가 시킨 일인지, 몇 번째 버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시점 기준의 자료인지만 중요할 뿐이다. 이 직원은 “시키는 거나 잘하라”는 말이 존재할 수 없는 회사라고 말했다.

“열심히 했다” 말고 ‘숫자’로 말하라

쿠팡의 업무평가는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매년 연말이면 올 한해 자신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최선을 다했다’라거나 ‘열심히 했다’고 써봤자 소용없다. 안 먹힌다. 4년간 쿠팡의 고위직으로 일했던 한 인사는 “평가제도가 얼마나 가혹하냐면 모든 평가를 정량 지표로 환산할 정도다”면서 “판매량 같은 수치가 나오지 않는 부서라 해도, 인사팀에서 어떻게든 정량 지표를 만들어서 평가한다”고 말했다.

쿠팡에서 2년간 일한 문석현 데이터경영연구소장은 “성과 측정에 사내 정치나 주관적인 요소가 끼어들 여지를 거의 두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쿠팡에서 일할 당시 PO실 실장이 인도계 미국인이었는데, 그가 늘 요구하는 것이 ‘숫자로 이야기해라’였다. 수치상으로 임팩트가 입증될 성과를 보여달라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평가등급은 TT(탑티어)-HV+(하이밸류 플러스)-HV(하이밸류)-LE(리스트 이펙티브) 등 4단계로 구분된다. LE가 하위 10%에 해당하는 낮은 등급. 3번 연속 LE를 받으면 점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현재 맡은 업무에 적합한 지를 따져보고 코칭을 해주는 개념이다. 하지만 “LE 등급을 받으면 사실상 버티기가 쉽지 않다. 꾹 참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가 이직을 결심한다”는 것이 쿠팡 직원들의 이야기다. 그만큼 쿠팡의 평가는 공정함을 지향하며, 냉혹하다.

쿠팡 인사제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짠 복지’다. 직원들은 명절에 지급되는 쿠팡 캐시(10만원) 외에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쿠팡의 직원 B씨는 “대기업은 연말에 목표치를 넘기면 직급별로 나눠주는 성과급이나, 유급 포상휴가를 주는 데는 그런 게 일절 없다”면서 “본인 평가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쿠팡의 한 임원은 “7만명이 넘는 직원들의 근무 환경과 업무, 고용형태가 다르다 보니 일률적인 복지를 마련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계속)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