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 중 하나가 ‘폭풍과 광풍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했는데, 나는 그걸 ‘폭풍과 단풍’으로 듣고, 다른 사람은 ‘허풍과 광풍’으로 들었다. 엉뚱하게 배달된 단어들 덕분에 대용량의 웃음이 그야말로 폭풍처럼 지나갔다. 이런 소동은 매번 새삼스럽게 흥미롭다. 발음은 비슷하나 의미는 전혀 다른 단어로 점프하는 순간, 그 자유분방함이 사전을 장난스럽게 헝클어놓는 데서 오는 쾌감이랄까.
한편으로는 광풍을 단풍으로 입력한 그 오배송의 맥락을 헤아리고 싶기도 하다.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이니, 게다가 내가 단풍에 홀려있는 것도 사실이니 광풍이 단풍으로 접수된 건 꽤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지. 매해 똑같은 단풍은 없다지만, 경험으로 아는 구간들을 지날 때면 벌써 기대감으로 부푼다. 11월 밤, 단풍나무가 가로등 빛을 받아 붉은 샹들리에처럼 반짝이는 풍경을, 딱 이 시기에만 물드는 단풍조명을.
낯선 단풍도 좋지만, 아는 나무가 물들 때의 감동만은 못하다. 내게도 매일 안부를 묻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있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멀리서도 보이던 환호의 빛깔이 지금도 생생한데, 그 나무가 2년 전 전지작업 때 싹둑 잘려서 키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마치 ‘우’라는 글자에서 초성 ‘ㅇ’을 도려낸 듯한 결과였는데, 그 ‘ㅇ’이 정확히 내 서재의 창문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방 내부가 갑자기 밝아졌다. 창밖의 나무가 사라지면 볕뉘와 그늘도 사라진다. 책이 있는 방에 햇빛은 부담이어서 나는 오늘도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데면데면하다. 겹겹이 붉은 커튼처럼 저기 있던 단풍나무는 어디로 갔는가! 블라인드라도 설치할까 싶다가도 단풍나무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참고 있다. 지금도 나무는 암벽 등반하듯 줄기를 뻗어내는 중이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나무가 움직인다는 사실. 언젠가 한 잎 한 잎, 유리창에 하이파이브하는 날이 오겠지!
윤고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