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 위해 독성 감수한다

2025-12-05

[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가나를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남반구·저소득·중저소득 국가)에서 전자폐기물(e-waste)을 재활용하는 노동자들이 생계를 위해 장기적인 독성 노출과 극심한 환경오염을 감수하는 ‘역설’에 빠져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시간대학교 연구진은 가나 수도 아크라 인근 대규모 비공식 전자폐기물 처리지인 ‘아그보그블로시(Agbogbloshie)’를 분석한 결과, 이곳에서 이뤄지는 재활용 활동이 노동자의 건강과 도시 환경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 결과는 학술지 NPJ Urban Sustainability에 실렸다.

유엔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매년 배출되는 전자폐기물은 6,200만 톤에 이른다. 이 가운데 구리, 알루미늄, 리튬이온 배터리 등은 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인프라에 필수적인 광물 자원이다. 그러나 이 전자폐기물의 4분의 1도 채 안 되는 양만이 공식적이거나 규제된 조건에서 재활용되고 있다.

나머지는 국가 차원의 보호·규제·등록 없이 비공식 영역에서 처리된다. 연구진은 전 세계 전자폐기물의 약 15%가 가나로 향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상당수는 “중고 사용 가능 제품”이나 “자선 기부” 명목으로 유입되지만, 실제로는 고장 나 사용이 어려운 노후 장비가 적지 않다.

이번 연구를 이끈 브랜든 마크 핀 미시간대 환경·지속가능성대(SEAS) 부연구과학자는 아그보그블로시를 “비공식 경제의 역설이 집중된 공간”이라고 규정했다.

아그보그블로시는 세계 최대 규모 비공식 전자폐기물 처리장 인근에 형성된 정착지로, 연구진은 이곳에서 55건의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핀은 “전자폐기물 노동자들이 하는 규제받지 않는 재활용 작업이 역설적으로 그들의 건강과 도시 환경을 동시에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곳 노동자 상당수는 극심한 빈곤과 분쟁을 피해 가나 북부 등지에서 내려온 이주민이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전자폐기물 해체·소각은 “그나마 돈을 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가 되고 있다.

아그보그블로시에서는 전선과 전자기기에서 금속을 추출하기 위해 플라스틱 피복을 태우거나, 산을 이용해 회로 기판 등에서 귀금속과 유가 금속을 분리하는 방식이 널리 사용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와 유해 가스는 주변 대기질을 급격히 악화시키고, 각종 오염물질은 토양과 인근 석호(라군)에 스며들어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들은 이렇게 추출한 금속을 현지 중간 상인에게 판매하고, 이 금속은 다시 글로벌 공급망으로 편입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광물들은 탄소중립·탈탄소화를 위한 재생에너지 설비, 배터리, 전기차 등 ‘녹색 기술’을 떠받치는 핵심 자원이기도 하다.

핀과 함께 연구를 진행한 디미트리스 구나리디스 SEAS 지리공간 데이터 과학자는 아그보그블로시와 그 주변을 대상으로 20년간의 인구 변화, 초미세 입자(PM2.5) 농도, 건물 약 20만 동의 위치 데이터를 분석했다.

구나리디스는 “도시화와 입자상 물질 농도 사이에 뚜렷한 양(+)의 상관관계를 확인했다”며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의 대기오염이 악화되는 동안 인구도 함께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아그보그블로시에서 그 관계가 가장 두드러진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 지역으로 몰리면서, 동시에 개방형 전자폐기물 소각으로 인한 심각한 대기오염에 더욱 노출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핀은 이번 연구가 “글로벌 사우스 전역의 비공식 경제와 비공식 정착지를 어떻게 규제하고 지원할 것인가”라는 폭넓은 정책 질문을 던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개입은 ▲강제 철거로 사람들을 주거와 생계에서 몰아내거나 ▲사실상 접근이 불가능한 시장 진입 장벽을 높이거나 ▲아예 문제를 외면하고 아무 개입도 하지 않는 식으로 양극단에 치우쳐 왔다”고 비판했다.

연구진이 제안하는 해법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생계는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중간 지대(hybrid)’ 접근이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전선을 태우지 않고도 구리를 분리할 수 있도록 와이어 스트립 등 간단한 도구를 제공하거나, 재정·기술 지원을 통해 보다 안전한 처리 방식을 도입하는 방안이다.

또한 일정 수준의 공공 통제와 안전 기준을 갖춘 중앙 처리시설 구축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런 시설은 재활용 자재의 구매처와 가격, 글로벌 공급망으로의 재유입 경로를 투명하게 만들고, 전자폐기물 재활용 과정 전반에 대한 안전장치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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